산속 안개가 짙게 피어올랐다.
사이카 마고이치는 시바타 카츠류우를 등에 업은 채 키이 반도의 험준한 산길을 내달렸다.
그 뒤로 사이카슈의 정예 닌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카츠류우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바싹 마른 눈동자에는 불타는 키타노쇼 성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도착했다.”
마고이치의 낮은 목소리에 카츠류우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은 온통 희뿌연 물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발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고이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익숙한 길을 따라가는 듯 정확했고, 바람의 흐름까지 헤아린 듯 조절되어 있었다.
그가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맞추고 일정한 각도로 발을 내딛자, 마치 공간이 갈라지듯 물안개가 천천히 양옆으로 걷히며 바위틈 사이에 감춰져 있던 입구 하나가 드러났다.
깊숙한 동굴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높은 암벽과 거대한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곳이 우리의 마을이다. 앞으로 네가 살 곳이기도 하지.”
사이카슈, 그림자 마을.
오다 노부나가를 몰아세운 키이 반도의 투귀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카츠류우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초가와 목재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마치 성채를 연상하게 했고 이곳저곳에서 훈련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휘두르는 소리.
화살이 파공음을 내며 과녁을 꿰뚫는 소리.
화약의 폭발음.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수련하는 낯선 세계였다.
“오오! 새로운 녀석이 왔다!”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츠류우 쪽으로 뛰어오는 소녀.
칠흑 같은 까만 머리에 선명한 눈동자.
카츠류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미카즈키, 인사하거라. 시바타 카츠이에님의 아들이다.”
마고이치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바타? 그 유명한 오다의 맹장! 원수이자 은인의 아들이 앞으로 우리 마을에서 사는 거야? 재미있겠는걸.”
미카즈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츠류우를 유심히 살폈다.
소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너무 겁먹지 마. 여기선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미카즈키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카츠류우는 여전히 침묵했다.
카츠류우의 눈빛은 일반적인 소년의 눈빛이 아니었다.
“미카즈키, 이 녀석은 많은 것을 잃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알겠어요. 아버지.”
시종일관 웃기만 하던 미카즈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것도 잠시 다시 카츠류우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는 혼자였어.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잊으려 애썼지. 뭐…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재미있게 지내지만 말이야.”
그녀가 손에 쥔 작은 단도를 높이 던졌다 받아내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카츠류우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우느라 눈이 퉁퉁 부었으면서 허세 부리긴!”
‘퍽!’
섬전 같은 속도로 옆구리에 주먹이 꽂혔다.
‘끄으윽….’
“일단 밥부터 먹자! 여기 음식은 진짜 맛있어. 아버지가 직접 요리하시거든.”
카츠류우가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맞은 것은 태어나 처음 겪은 일이었다.
마치 서열이 정해진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뒤를 따라 미카즈키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 중앙으로 향하는 길,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이 카츠류우를 둘러쌌다.
“마고이치, 이게 무슨 짓이냐! 오다의 쓰레기를 이곳에 데려오다니.”
언성을 높인 나이 든 사내는 사이카슈의 원로 중 하나인 야마자키였다.
그 순간, 마고이치의 눈빛이 흉악해졌다.
“시바타 카츠이에는 우리 모두의 은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의 아들이니 당연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무리 중 몇몇이 살기를 뿜어냈다.
“내 형제들은 오다 놈들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런데 지금 그놈들의 핏덩이를 우리가 보호하자는 건가?”
카츠류우는 마고이치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명예롭던 오다 가문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증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예상보다 컸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야마자키님,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결정? 나는 동의한 적 없다!”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그때 미카즈키가 카츠류우의 옆으로 나섰다.
“야마 할아버지! 이 녀석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비켜라, 미카즈키.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마고이치가 한 발 앞으로 나와 모두에게 말했다.
“과거는 과거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이 녀석의 부친 때문이다. 그리고, 오다 가문을 집어삼킨 하시바에 대한 원한은 그 누구도 이 녀석을 넘어서진 못할 것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장, 저 아이를 죽입시다.”
키타노쇼 성에서 하시바의 군세를 뚫고 길을 열어준 니시아치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사이카슈 5인방 중 가장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광장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시바타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하시바의 병사들이 언젠가는 이 마을을 찾아낼 것입니다.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이 아닙니까?”
“니시아치! 네놈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구나!”
야마자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니시아치의 말에 동의했다.
카츠류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수 만의 병사를 헤치고 나왔는데,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상황. 불과 며칠 전 가문의 몰살을 목격한 아이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제 아버지, 시바타 카츠이에가 오다 노부나가님을 따른 것은 무사로서의 본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그림자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사이카슈를 인정하고 존중하였습니다.”
마고이치가 의외라는 눈으로 카츠류우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으나 그 눈빛과 태도는 분명 시바타 카츠이에의 그것이었다.
“제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제 손으로 하시바 히데요시를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니시아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카타나가 들려 있었다.
“탈출하는 동안 죽어있던 놈이 입은 살아있구나.”
니시아치의 손이 바람같이 움직이며 칼날이 카츠류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츠류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예리한 칼날이 그의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흥미롭군. 죽음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군”
니시아치가 칼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녀석을 지켜보겠다. 놈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한 거짓인지를.”
원로 야마자키가 역정을 내며 말을 꺼내려할 때였다.
“크흠, 사이카슈 최강의 전력인 이 몸이 판단하기에도 저놈을 살려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재미있단 말이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놈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구도 모르거든”
중앙 광장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든 료에몬이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야마자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좋다. 하지만 이놈 때문에 사이카슈가 위험해진다면 내 손으로 죽이겠다.”
그가 마지막으로 카츠류우를 노려보고 돌아서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마고이치를 따라 그림자 마을의 깊은 곳으로 안내받은 곳에는 낮은 초가에 카츠류우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작은 방에는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간단한 생활 도구만 놓여 있었다.
“내일부터 기본적인 수련을 시작하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고이치는 카츠류우의 첫 질문이 어떤 것일지 궁금증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애병 흑뢰십문자창은 어디 있습니까?”
“절망의 순간에 네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무기란 말이냐?”
카츠류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시바타의 모든 것을 제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창은 시바타의 혼입니다.”
마고이치는 잠시 침묵했다. 이 어린 소년의 눈빛에서 시바타 카츠이에의 모습이 보였다.
“가져왔다. 하지만 아직 너에게 맡길 수 없다.”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네가 나를 이겼을 때.”
카츠류우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지금부터 수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서두를 것 없다. 살아남는 법을 먼저 알려주마. 이 마을에도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꽤 있는 것 같으니.”
이때 소년의 옆구리에 뼈아픈 치명상을 남긴 소녀가 다가왔다.
“아버지, 제가 한동안 이 녀석의 곁에 있을게요!”
“그래, 살살하거라….”
“… 예?”
소년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소녀는 그저 웃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마을 외곽 무심곡의 폭포에서 수련이 시작되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겨나가기 전까지 깨달음이란 없다. 강철 같은 육신에 불굴의 혼이 깃드는 법.”
마고이치의 지시에 따라 카츠류우는 폭포 뒤에 숨겨진 절벽을 오르내리고 산길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수련과는 별개로, 옆구리에는 주먹 자국이 두 개나 더 늘어났다. 무릇 닌자란 언제든지 살기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날아든 미카즈키의 섬전 같은 일격 때문이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 수련은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과도한 수련이었지만 카츠류우는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첫날치고는 충분히 했다.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지.”
“아니요. 아직입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
땀에 젖은 얼굴로 카츠류우가 말했지만, 마고이치는 고개를 저었다.
“서두를 필요 없다. 복수는 빠른 자의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의 것이다.”
카츠류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마고이치의 지시에 따랐다.
사실 오늘 하루에 쓰러진 횟수만 해도 스무 번이 넘었다. 절벽을 오르다 떨어지고, 산길을 달리다 넘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미카즈키의 강력한 일격이 원인이었다. 또 어디선가 그녀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서 목뒤의 털이 곤두서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상황을 눈치챈 마고이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카즈키. 이제 그만해라. 밥 먹으러 가자꾸나.”
‘스윽’
그림자 속에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아버지.”
“그래, 뭔가 느낀 것이 있더냐?”
“아…. 쓸 만한데요? 마을의 다른 녀석들은 한 대만 맞아도 다 도망가는데,
카츠류우는 달라요. 이상하게 계속, 그냥 막 버텨요.”
“오늘은 좀 과했던 것 같구나. 내일부터는 적당히 하거라.”
“쟤가 버티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털썩’
오랜 대화 속에 긴장이 풀려버린 카츠류우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대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간 마고이치가 카츠류우를 업고는 미카즈키와 함께 광장으로 돌아갔다.
사이카슈 그림자 마을의 저녁 식사 시간, 마을 사람들은 넓은 마당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카츠류우는 구석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때 미카즈키가 다가왔다. 소녀는 소년의 옆에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긴장하지 마.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려. 그냥 마을 사람들을 이해해 줘. 너 때문에 무서워서 저러는 거니까.”
카츠류우는 묵묵히 밥만 먹었다.
“너, 나랑 말 안 할 거야?”
소녀의 주먹이 올라가려는 순간, 카츠류우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맞아서 턱이 안 벌어져….”
자세히 보니, 카츠류우는 먹는 건지 뱉는 건지 모를 정도로 기를 쓰며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아… 미안…. 이해해. 사실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순간, 미카즈키의 눈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부모님을 잃었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님이 날 키워주셨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카츠류우는 처음으로 미카즈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자신과 닮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창술을 배웠구나.”
“어떻게 안 거야?”
“네가 밥을 먹는 방식 말이야. 손가락과 팔꿈치의 위치와 각도. 창을 다루는 사람과 같으니까.”
카츠류우는 미카즈키의 관찰력에 감탄했다.
“닌자는 말이야, 상대의 작은 습관 하나까지도 분석해야 해.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리고 여기서도 창술은 배울 수 있을 거야. 아버지께 부탁해 볼게!”
처음으로 카츠류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때,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적이다! 하시바의 순찰대가 접근 중이다!”
"제길, 모두 위치로!"
무기를 든 닌자들이 빠르게 자신의 위치로 이동했고 모두가 즉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