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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Sep 11. 2021

불금 밤 휘청이기(0910)


1.


"남편~ 요새는 밤에 어떻게 입고 나가야 돼?"



불금 8시 반.

나가려고 채비를 했다.



달려야겠어!




아이 낳고 이 시간에

밖에서 걷기는 하늘의 별따기!


한국의 9월은 너무 아깝지!


그래!

오늘은 하늘의 별을 따자!



그런데 요즘엔 밤 날씨가 어떤가?


당최 나간 적이 없어서

감도 안 온다...





2.

나오기 30분 전.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다.


"하나님.

자는 동안 면역세포가 강력하게 활동하게 해 주세요~" 


약을 먹이고

숨쉬기 좋게 높은 베개를 대주고


"엄마는 너무 감사해~

준이가 아픈데 마침 주말이라

너를 정성껏 간호해줄 수 있잖아."


달콤한 말도 해주고.


"이건 나을 병이니까 걱정 마"


확신에 찬 말도 해주고.


이번 주말 모든 일정 취소.


그리고 감기라는 것은 적어도

이틀 사흘 나흘은 되어야 나을 테니

이번 주말은 오롯이 간호 모드가 되겠군.

헤아려본다.



아이 코감기 정도에는 나름 이렇게 베테랑이 되었다니

아주 뿌듯하다.


무엇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심된다.


하지만 주말에 꽤 답답할 것도 미리 안다.


애가 아프고 낫는 끝물에

엄마가 아프곤 한다는 것도 안다.


몇 번 아프고 나니

애를 간호할 때는 나도 잘 챙겨야 한다는 것도 이제 안다.



아. 맞다.

내일은 남편이 골프도 가잖아.


그렇다면 더더욱

내일 독박 간호 모드를 위해

미리 싸돌아다녀야겠어!


롸잇 나우!






3.


금요일은 특히 더 느리게 걷는 사람들
길거리 예쁜 커피숍
불야성 치킨집


그래서 나왔다.



이야...


9월 밤 풍경.


바람.


공기.


너무 좋잖아?



게다가 금요일이야.



손을 꼭 잡고 걷는 연인.

강아지와 산책 나온 부부.

엄마와 운동 나온 딸.

야식을 픽업해서 야외에서 먹는 청년들.


사람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해외인가?


나. 누구?


여기. 어디?



그러다 갑자기 좀 억울하다.



뭐야~~~~


내가 애 재운다고 같이 누워있는 동안

당신들은 밖에서 이렇게 재미보고 있었단  말이지.






4.


달리기를 하려고 했다.


야침 차게 달리기 어플도 켜고!


러닝화도 신고!


첫 화면 등장하는 이 여자.

 

이 여자의 복근하고 가슴하고를 

손가락 두 개로 막 확대해보려고 애쓰면서


'와~ 탄탄하네~~!!' 

거리면서



런데이 어플 모델



그런데...



그런데...



초지일관은커녕


초지.. 일초. 후

포....



오랜만에 만난 밤 풍경에

넋을 잃고 휘청였다.


아~밤공기에 취한다.


달리는 것보다 

휘청이는 게 더 어울리는 밤이다.


그래서

 달리겠다.



무슨 이런 밤에 혼자 달리고 난리냐.

사람들 낭만 깬다~

워워워~~~~


당신들을 위해 내가 달리기 포기해줄게~






그럼 걷자!



어? 그런데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잖아?


그간 매미 군단의 임종을 여기저기서 목격하긴 했만,

정신없이 사느라 귀뚜라미님들의 시대가 온지는 몰랐네.  


소리 나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소리 채집에 나선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ㅡ 귀뚜라미 편


갑자기 내가

유지태가 된 것 같다.


유지태는 그 영화에서 소리를 채집하고 다녔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이영애한테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



캬아.. 명대사.


유지태가 되어

한참을 귀뚜라미 소리를 찾는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른 스포일러 발견!




띠로리~



~~ 이건 또 뭐지요~?



달리기 한번 하겠다는데

유혹이 한두 개가 아니군요!



밤공기 운운하며 달리기 1초만에 포기하더니


닭강정에 홀려 걷기마저 포기하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초초초초 붐비는 금요일 밤 9시에

쿠팡 잇츠 아저씨들랑 배달의 민족 아저씨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러닝화를 신고)





아저씨들이 나를 보는  표정



아저씨들의 표정을 견뎌내며

한참을 기다려 겨우 겨우

"닭강정 포장이요!"를 외치고

(나름 뛰어난 절제력 발휘!

컵!

컵!이었다고!)


앞에 밀린 닭강정 배달 10개가 완료돼야  

그 컵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

순수한 아이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해버린다.



"헤헤 괜차나여~~~"




쿠팡 잇츠 아저씨들과 배달의 민족 아저씨들의 땀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언어와 몸짓.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현장조사를 하듯이.


갑자기 재밌어 죽겠다.


인류학자가 된 것 같다.



"아줌마 꿈이 인류학자거든?


장래희망은 인류학자인데

지금희망은 닭강정 먹는 거야."


옆에 어떤 애가 앉아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해줬을 거다.



5.

소중한 닭강정을  받아 들고

집까지 오는 동안


체면을 지킬 것인가

실리를 추구할 것인가

잠시 망설인다.


그러다 '체면이 밥먹여주냐?' 하며

와구와구

손에 있는걸 먹어치운다.



걸으며 먹느라 사정없이 흔들린 강정들




다 먹고 나니

달리기고 뭐고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그래도 어플을 보니

밤거리를 50분간이나 헤맸군.


운동하긴 한 거다!!

(큰소리치기는)


달콤한 닭강정과 함께한 가을밤 산책.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가뿐하다.

상쾌하다.

재밌다.

신난다.

힘도난다.


이렇게 또.

주말 집중 육아에 쓸 배러리가 full로 채워진다.


오늘 밤 

내 눈에 담은 가을밤 정취를


내일 

아이 눈에 고스란히 전해주련다.


거리에 생동하는 삶의 충만한 에너지를

집안에 흘러넘치는 따뜻한 돌봄 에너지로 바꿔주련다.



최근에 들은 명대사.




내 안에 있어야
남에게 줍니다



매일매일 바닥이 나도

매일매일 채우고 사는

매일매일을 위하여!


건배!






오늘의 걷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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