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해 살아남기.
사랑하는 이의 채취, 타인 없는 고독의 흔적, 추억이 담긴 씁쓸한 향기.
영화 '캐스트 어웨이' 안의 이 모든 것은, 일순간 담배 연기처럼 흩어질 수 없다.
외딴섬에 홀로 남겨진 척 놀랜드에게는 무형으로 존재하는 이 기억과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평소라면 한동안 공간을 채우고 습하게 차오른 다음,
응결되어 흐르는 물이 된 후 사라지는 새벽안개와 같은 과정을 자연스레 거치는 영험한 성질의 그것.
그곳의 그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붙잡고 싶은 하루하루였을 것이다.
그 호흡이 답답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상황의 진실성 때문이다.
실로 길고 더딘 기다림의 연속인 삶 안에 작은 조약돌만 던져져도
여러 방향성을 가진 파장들이 선택을 재촉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개선해야 하는 미션으로 우리의 삶은 더욱 지난해지곤 한다.
현실의 평범한 삶마저도 이러한데
영화 속 척은 사랑하는 일과 사람의 품을 떠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FedEx의 직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1분 1초의 시간도 중요한 그는
시간이 멈춰버린 섬에서 모든 것을 멈춘 채 남겨진다.
그런 와중 함께 표류된 FedEx 우편물 중 하나인 배구공은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사실 척은 배구공 '윌슨'을 통해 내부의 목소리와 만났다.
혼잣말로, 자신의 여러 가지 마음들의 소리를 밖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무인도라는 공간에 담긴 자연의 소리 만이 가득한 영화 속에서, 척의 혼잣말은 이렇게 명분을 얻는다.
또한 그의 손에 난 상처로 인해 흐른 피가 윌슨의 얼굴을 완성했다는 것이
생명 없는 객체에게 존재감을 부여하게 된다.
4년의 시간을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며 시기와 수단을 판별하고 준비한 그가
파도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을 때,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일부가 뜯기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외로움, 무력감, 슬픔. 또는 코코넛과 물고기로 점철되는 그간의 시간 속에는 연인인 켈리에 대한
그리움과 배구공 윌슨과의 대화가 함께 했었다.
그런 그가 윌슨을 바다에서 떠내려 보내게 되었을 때는 켈리를 잃었을 때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혼자일 때 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조각을 만들어 가고 조합해 낸다.
척은 한정된 공간에서 배구공 윌슨과 만들어 낸 자신의 한 조각을 뜯겼다.
윌슨은 자신의 일부였기에, 자신의 마음을 가진 만져지는 객체였기에.
그는 바다에 살점이 뜯겨 떠내려 간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하게 된다.
난파 후 무인도에 표류한 척에게 파도에 쓸려 온 우편물들은, 4년의 시간 동안 그에게 문명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고, 삶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시의적절하게 파도라는 대상을 대하기까지, 그것은 인간에게 무력감만을 안겨 주는 절대 권력의 모습이었다.
어느 방향도 제시받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의 여지가 충분한 세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자신의 발목을 꽁꽁 묶어 두었던 파도를 친구로 만들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계산과 준비를 했을까.
알고자 하면 더 넓고 깊게 우리를 흔드는 현실의 파도에 쓸려, 가끔 마음의 섬에 홀로 있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겠어.
척이 얘기해 주는 것처럼, 파도가 어떤 우편물을 보내 줄지 알 수 없으니까.
이렇게 무인도에 표류했던 쓰디쓴 기억을 안고 척 놀랜드는 돌아오게 된다.
외로움과 죽음의 공포가 함께 했던 망망대해 외딴섬에서의 힘든 시간을 넘어 가족의 품에 돌아왔는데
가장 소중했던 사람인 캘리는 유부녀가 되어 이제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잔인한 상황이 주어졌다.
시간도 사람도 잃은 그의 기분은 어떨까.
분초를 다투던 일상의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불안하고 외로웠는데 말이야.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 보상으로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꾸려가야 할 새로운 삶과 인간관계의 과제가 주어졌다니..
그러나 그와 함께 나 또한 다시 마음을 추슬러본다.
거친 파도가 있는 망망대해가 아니라, 강이나 호수 같은 정체된 성질이었다면
혼란과 죽음의 두려움은 없겠지만, 숨 쉬는 행위의 영험함을 토로하는 축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야.
손에 올려진 기억의 조각에 눈물이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둥그렇게 마모되고
그곳을 쓰다듬는 손의 까칠한 촉감이 어느새 굳은살로 무뎌진다면.
변질된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으로 더 빛나는 조각의 흔적이라면.
여러 개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