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면 차라리 환대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일까?"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 안 뒤푸르망텔, 필로소픽.
나 중심의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려는
현대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타자성'입니다.
타자(他者)란 다른 사람(타인)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층위에서 사용됩니다.
가령 타자성을 이해하기에 좋은 예시가 있다면 엄마와 자녀의 관계로 설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배 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란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엄마와 자신을 '동일체'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엄마와 자신이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아이와 독립적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쪽은 엄마입니다.
그래서 종종 어떤 엄마들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고, 너는 나야"
아름다운 이 문장이 어떤 아이들에겐 숨 막히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신가요?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하는 엄마의 말과 행동이 다 '옳다'라고 착각합니다.
지바 마사야는 "하나의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 어긋남(간극)이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 사상의 큰 방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완벽히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고정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가고정적'이기에
"절대가 아니다"라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환대란 무엇인가요?
한자어로 환대(歡待)는 "반갑게 맞이하여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은 이것이 일종의 '환대산업'으로 발전하여 타인을 기꺼이 환영하고 대접하는 일이
산업이 되었습니다.
보통 한 지역에서 나고 죽었던 고대세계의 사람들과 달리
오늘날은 지역과 지역의 이동과 이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착생활을 하던 고대세계의 사람들은 숙박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기에
외지인을 만날 기회도 흔하지 않았고, 그들을 집에 맞아들이는 '환대'가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도덕적-윤리적 책무이자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대세계에서의
환대는 비상업적이었던 것이지요.
다만 지역 간, 문화 간 이동이 잦은 현대인들에게 이런 자발적 환대를 무작정 기대하는 것은
매우 요원한 일이기에 산업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필요한 음식과 잠자리만이
아니라 '대접받는 느낌'까지 상품화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진정한 의미로서의 '환대'를 경험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환대를 진정 경험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글의 시작에서 인용한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 이렇게 되묻듯이 말합니다.
"차라리 환대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도 아니라면 타자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 정말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절대적 환대는 나에게 내 집을 개방할 것을, 또 '가족의 성과 이방인의 사회적 지위
등을 갖춘 이방엔'에게만 향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미지의, 익명의 타자에게도 향할 것을, 그리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할 것을,
그를 오게 내버려 둘 것을, 그가 도착하도록 내버려 둘 것을, 내가 그에게 제공하는
장소에다 자리를 가지게 둘 것을 요구한다."
그런 위험부담을 우리네 삶으로 끌어안는 것.
그런 위험 속으로 나를 내던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니 그것이 위험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환대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오늘도 그 공간을 만들어 보려 애를 쓰지만
여전히 저는 환대에 발 딛는 것이 두렵습니다.
다만 나를 그렇게 환대했다고 믿는 존재가 있음에 다행이란 생각이.
그리고 그 존재를 닮기에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또 두려움과 무력함이 생깁니다.
여전히 사랑을 모르는 탓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이 구절 하나가 떠오르네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 4:18, 새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