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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3. 2019

신학문 (新學問)

신학문,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상설 생가

독립운동사에 대한 인물과 장소, 그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있지만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는 누군가의 미묘한 강요에 의해 보게 되었다. 근대시기 아관파천과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모두 볼 수밖에 없었다. 신학문은 새로운 학문을 의미한다. 질문과 그 궁금증에 대해 낯선 한국사람들은 신학문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의 근대시기에 신학문을 이야기할 때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진천의 이상설이 같이 신학문을 공부한 지인들은 이 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족을 팔고 그것을 정당화했던 시기에 '일인 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 권불 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려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글을 올려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으나 1905년 11월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진천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 이상설은 국가 위기를 맞아 해외에 신교육기관을 창립하였고 황제의 명을 받아 특사외교를 수행하다가 끝내 독립운동가로서 생을 마쳤다. 시대의 풍파에 휩쓸렸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다. 특정 드라마 속에서 김태리는 논어를 필사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논어는 당연히 의미 있다. 그렇지만 신학문과 어우러지면 그 깊이가 더 해질 수 있다.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남녀노소를 떠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변화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상설은 대표적인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글과 힘은 동시에 같이 가지고 있을 때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다. 일제강점기에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변화시키려고 했고 어떤 이는 힘으로서 저항하려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 의사는 평소부터 이상설을 숭모하고 있었으며 재판 때의 조사서를 보면 이상설이 안중근 의사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상설은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수학·물리·경제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진천에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1997년으로 1870년(고종 7)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전 이조참판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입양된 그  시대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 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기도 했던 이상설은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7년 3월 니콜 리스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상설은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휘·이회영 등의 동지들에게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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