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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6. 2019

70년 전

대전역과 그날의 일상

70년이라는 세월을 살지 않았으니 몸소 겪은 것은 내 나이만큼 그리고 무언가 주변을 인지하고 시작하고서부터이니 미루어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대전역이 대전에 자리하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공주에 기차역을 지나가는 것을 그 지역 유지들이 반대했다는 알 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한일병합을 위해 빠른 철도 부설을 하기 위해서 비교적 지역색이 덜했던 대전역이 일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근대역사 건물이 자리한 옛 충남도청에 오면 대전역의 근대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지금 오래 전의 특별한 일상과 대전에서 대전역이 자리하게 된 이유와 대전을 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된 사건을 다루고 있어 만나볼 수 있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듯이 일본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을 뒤로하고 뜨는 강대국 미국을 일본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러시아를 이긴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대전에 대전역이 부설되던 그해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일본에서 가쓰라와 회담하여,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하였다.

겉으로는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영국, 미국, 영국이라는 강대국만의 평화조약이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대전에 철도는 예정보다 빨리 개통이 된다. 대전이라는 신도시가 급부상하게 된 이유에는 상관없어 보이는 러일전쟁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대전역이 개통되고 나서 회덕현 자리에 있던 군청이 1910년에 대전리로 옮겨졌고 1932년에 충남의 도청소재지가 지금 이곳에 자리하게 된다.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은 1909년 마산으로 가는 길에 대전을 들린다. 그 날이 1월 13일로 1910년 한일병합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전에 마지막 행보였다. 

특별한 일상이 있던 그때에 대전도 많은 패션 변화가 있었다. 미국의 패션의 변화는 대전역이 처음 영업을 시작한 1905년에 시작되었다. 그걸 모던 트래블이라고 하며 여행을 하기 위해 자동차를 사기 시작했는데 이때 패션이 변화했다. 

슈트는 남자들이 입는 가장 심플하면서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여성에게는 시프트 드레스, 셔츠 드레스, 튜닉, 할스톤의 카프탄은 실용적이면서 모던한 느낌을 부여한다. 

대전에 처음 전화기가 개통된 것은 공전식 적화기로 1957년에 개통되었는데 공전식은 수화기를 들면 교환원이 상대방과 연결해주는 전화기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12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두 번 겪었다. 식민시대의 강요와 한국전쟁 이후에 재건과 성장의 시대를 만나야 했었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문화의 수용과정에서 일상의 삶도 있었지만 왜곡된 의식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소소한 일상보다 그릇된 이념이 더 앞서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삶 속에 특별함도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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