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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28. 2019

충청수사

임진왜란 속의 충청수영성

조선시대에 삼도수군이라고 하면 보령 오천항에 자리한 충청수영성과 전라좌우수영성, 경상좌우수영성이다.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으니 각각 하나의 바다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성지이며 방어기지의 역할을 한다. 충청수영성을 지휘하던 충청수사의 계급은 현재의 사단장급으로 수군절도사라고도 부른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전쟁을 대비한 것도 있었다. 

충청수영성에 있는 건물 중 오천 수영 관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충청수영 내삼문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충청수영 장교청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충청수영 진휼청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청수영성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충청수영성은 큰 풍파 없이 방어기지로 활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수영성도 전쟁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했던 충청수사는 정걸이라는 사람과 최호라는 사람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서 활약했던 정걸은 자신의 명대로 살았지만 이후 임명된 최호는 이순신이 실각하고 나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지휘를 받아 칠천량에서 싸우다가 충청수영 병력 전부를 남해 바다에 수장하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다. 

이곳은 조정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장교청으로 수군절도사인 충청수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가끔 출몰하는 왜구를 제외하고 큰 전투가 없었던 충청수영성 역시 격랑의 소용돌이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군인이었던 정걸은 1591년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휘하에서 판옥선을 어떻게 운영하고 신형 총통을 쏘는 방법 등의 노하우를 전할 수 있는 노장이었다. 이순신 역시 정걸을 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의 해전은 대부분 남해 바다에서 일어났다. 고요한 이 보령의 앞바다까지 왜군이 왔다면 조선은 더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군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던 충청수영성의 병력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해안선으로 이어진 성곽은 축조 당시의 그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저 앞에 보이는 영보정이 유명하다. 

부산포에서 조방장으로 전공을 올리기도 했던 정걸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년 후인 1593년 79세의 나이로 충청수사에 임명되었다. 충청수영성과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행주대첩의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의 지상군을 엄호하였다. 그렇게 활약하던 정걸은 1595년에 사직을 했다. 

이순신은 계속 조정에 수륙 합동 작전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순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걸이 이끄는 충청도 수군의 합류는 전격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이순신이 조정에 첫 번째 보고서를 발송한 날이 5월 10일인데 충청도 수사 정걸이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 날은 6월 1일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그리고 6월 13일 거제도 세포로 진을 옮겼을 때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 순천 부사 권준, 낙안 군수 신호, 방답 첨사 이순신이 합류했다. 

이후 충청수사가 된 사람은 바로 최호다. 최호 충청수사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던 최호는 이곳에 충청수사로 왔을 때 임란 중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홍가신(洪可臣)과 함께 주장(主將)이 되어 홍산(鴻山)·임천(林川) 등지에서 난적을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충청수사 최호는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합류하기 위해 1597년 남해 한산도로 내려갔다. 이때 일본의 적장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라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등이 모두 참전했다. 세명의 적장은 모두 이순신에게 옥포해전, 한산해전, 안골포해전에서 패한 장수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도망간 경상우수사 배설과 12척의 배를 제외하고 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에게 최후의 날이었다. 


오천항으로 통하는 이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다. 망화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다.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던 공간이 충청수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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