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三代)

대전에 자리한 창주 사적공원

혼자 살고 있는 가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이때에 삼대가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조부모에서 부모, 자식으로 이어지는 가풍은 사람의 인성을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그런 가풍이 있었던 가문으로 은진송씨와 광산김씨가 있다. 오늘 말하려고 하는 성씨는 광산김씨다. 작일 지인과 논산을 여행을 갔는데 그곳을 가다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선정된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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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계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희에 대한 이야기다.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김익희와 처의 묘소가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산 8-9 [대덕대로 507-150]에 있다. 광산 김 씨의 집성촌이 논산에 있고 할아버지 김장생의 묘와 큰 아버지 김집의 묘도 논산에 있다. 그렇지만 김반·김익겸의 묘(金槃·金益兼의 墓)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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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 사적공원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곳 옆으로 김익희의 묘가 있다. 김집에 비해 알려진 것이 적은 편이지만 아버지인 김반 역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급제하여 태학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613년 광해군이 의붓동생인 영창대군을 역모사건으로 몰아 제거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0년 동안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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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김집, 김반, 김익회 등은 말 그대로 3대가 조선왕조에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아버지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듯이 아들 역시 영의정에 추증되는 명예를 얻게 된다. 봉분의 좌우에는 망주석 1쌍과 높이 169㎝, 폭 50㎝, 두께 40㎝의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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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희의 행보 중에 눈에 뜨이는 것은 바로 단종에 대한 것이다. 세조로 즉위한 후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외면받아 왔지만 김익희가 1653년 부제학 재직 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드릴 것을 주장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는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에 대제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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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반과 형제가 같은 곳에 광산 김 씨 가문의 묘역에 있지만 자신은 이곳에 있다. 아버지 김반의 묘역에는 부인의 묘 2기와 큰아들 익렬(益烈), 셋째 아들 익겸(益兼), 손자 만준(萬埈)의 묘가 있으며, 두 개의 정려문(旌閭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동네에 세우던 문)이 있다. 익렬, 익희, 익겸으로 돌림자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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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서인계 정치인으로 활동한 문신 김익희와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합장 묘소 앞에는 김익희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파의 한 사람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주장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김익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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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보이는 창주 사적공원 어귀에는 신도비 묘각이 있는데, 묘소 앞의 묘비의 보존을 위해 원본 묘비와 신도비가 함께 있다. 신도비는 1712년(숙종 38) 11월에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높이 410㎝, 비신 높이 250㎝, 폭 93㎝, 두께 4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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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사라고 하면 암행어사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려시대에 시작된 어사 제도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사헌부의 전신인 어사대의 관원을 감찰어사라고 불렀으며 감찰업무를 전담하는 분대 어사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 중반 이후에 암행어사제가 등장한다. 김익희가 수행한 독전어사는 전투를 독려하는 직책이었기에 주로 전란 시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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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의 여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나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기옥(畸翁) 정홍명(鄭弘溟)에게 고문(古文)을 배웠던 김익희는 명실공히 대학자로서 조선 중기 학문을 대표하였던 사람이다. 삼대에 이어 명실공히 학문과 정신으로 시대를 이끌었던 사계 김장생 가문은 배움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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