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면 보살과 화령장 전적비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 수가 없다. 자비와 용서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며 그렇지 않다면 공허한 말뿐이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도 없는데 안 한다고 외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안동과 영천 등을 넘어갈 때 항상 지나가는 곳이 있다. 일명 화령장지구 전적비가 세워진 곳이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을 저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차를 세웠다. 한편에는 예전에 사용했던 군사장비가 놓여 있고 한 켠에는 보살처럼 보이는 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고 생각은 항상 했었다.
상주 화령면 신봉리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6호 지정된 상주 신봉리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보살은 말 그대로 자비를 행하는 대상이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이 석조보살입상은 윤곽이 풍만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옷 주름이 간결하고 두껍게 표현되어 있다.
옆에는 여러 사람들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우린 공적을 이루면 공적비를 세운다. 대부분 장군이나 리더가 그 비에 이름을 새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이루었지만 사람들은 몇 명만을 기억할 뿐이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으니 1,000년은 지난 석조보살입상이다. 자세히 쳐다봐야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높이는 230cm에 이를 정도이니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며 넓적한 1매의 화강암에 돋을새김을 하였으며 머리에는 3면 보관을 쓰고 있다.
자비를 베푸는 보살입상을 보았으니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전쟁의 상흔인 화령장을 보기 위해 앞쪽으로 걸어가 본다.
화령의 노래라는 것도 있던가.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보통 공수부대 등이 우선 전선을 막는 역할을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미공 수부 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화령지구 전투는 후 인천 상륙작전의 교두보를 만들어준 것도 사실이다.
‘화령 전투’는 1950년 7월 17일 ~ 22일까지 경북 상주시 화령 지역에서 국군 17 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격멸하여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전투이다. 방어선 구축이 되지 않았더라면 한국 일부 사람들만 미국령으로 옮겨가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1950년 7월 19일 제17연대장은 북한군 제45연대가 후속하여 화령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로의 노획문서를 통해 알았다. 여러 전투 후에 북한군 제15사단은 예하인 제45연대가 동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국군 제17연대장은 북한군이 전면 공세를 취할 경우 이를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군단에서는 제1사단을 화령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화령장으로 이동한 제1사단은 예하 11, 12, 13 연대 3개 연대를 화령장 부근에 전개한 후 갈령 고개 북방으로 북한군을 격퇴한다.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가 화령장 부근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7월 24일 제1군단에서는 작전지역을 미군에 인계하고 안동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화령장 전투는 끝나게 된다.
최근 일본과의 상황으로 볼 때 힘을 가진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평화는 지켜질 필요가 있고 지켜져야 하지만 그것은 힘 있는 사람이 그만한 자비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항상 지나가면서 이곳이 궁금했었다. 어떤 지역이기에 그다지 크지도 않은 공간에 굳이 예전에 사용했을 군사장비를 가져다 놓았는지 말이다. 게다가 옆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불상도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비와 평화는 떨어져 있지 않다. 화령장 전투 후 한국은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될 수 있었다. 전우가 있기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미국 육군 제101 공수사단 제506 낙하산 보병연대 제2대대 제5중대(일반적으로 5번째 알파벳의 E를 딴 Easy 중대)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