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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3. 2019

스승의 길

세종대왕의 스승을 모신 장성 죽림사

조선이 500년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혹독한 왕세자 수업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임진왜란 이후에 그런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끈이 약해지고 정조 이후에는 그 맥이 끊기다시피 하면서 결국 권세 가문에 흔들리면서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던 조선의 국왕들은 균형점을 잘 찾았던 왕들이 대부분이다. 두 명이 폐위되기도 하고 임진왜란의 전화에 휩싸이게도 했으나 조선의 왕들은 능력 있는 신하의 균형을 맞추고 명분이 무엇인지 제시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저력에는 왕세자 교육이 있었다. 비록 왕세자라고 하더라도 그 수준이 되지 않으면 왕은 과감히 내쳤다. 비운의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그러했다. 과연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역대 대통령들이 조선의 왕보다 정치적인 균형을 잘 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어나 배우고 익히고 경연에 나가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세월을 버티고서야 왕의 자리에 오른다. 왕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공부하며 산 왕들이 수두룩 하다.  

전라북도 장성군에 가면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던 심은 이수를 모시는 죽림사가 있다. 본관은 봉산(鳳山). 봉산이씨의 시조로 자는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 또는 관곡(寬谷)인 이수는  김여지(金汝知)가 소명(召命)을 전하자 상경하여 여러 왕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제자였던 세종이 즉위하자 사재감정(司宰監正)·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1422년(세종 4)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고부부사(告訃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제시할 것은 명분과 균형이다. 지금 여당과 야당은 대척점에 있지만 옛날의 왕들은 다른 정파의 균형을 꾀한 사람이 많다.  지금도 빈부의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토지를 다스리는 데는 조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공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공법의 공이란 여러 해 동안의 수확을 비교하여 일정한 평균치의 세액을 확정하는 것인데 풍년이 든 해에는 조금 더 거두더라도 좋은데 적게 거두고 흉년이 든 해에는 밭에 거름을 주기도 부족한데 반드시 정해진 세액을 거두면 문제가 된다.  

죽림사에 모셔진 이수는 1427년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고, 1429년 예문관 대제학·이조판서에 재 등용되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난다.  

죽림사는 스승의 길을 걸었던 사람을 기리는 곳이다.  태종이 인재를 구할 때  충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스승이 되었으며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중후하며 덕행이 높았던 사람이다.  이수는 비록 정승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지만 세종은 횐옷을 입고 애도하는 식을 거행하였으며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며 예우했다. 

스승의 길이란 그 제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면 거울처럼 드러난다. 세종대왕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종을 도운 것은 사실이나 스승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을까. 


*이수 선생의 유작시 三色桃花詩


李白桃紅品自殊 하얀 오얏꽃과 붉은 복숭아꽃이 서로가 다른데

一枝三色問何由 한 가지에서 세가지 빛깔을 내는 것은 무슨 연유인고

兄緣先後分深淺 다만 먼저 피고 뒤에 피면서 그 깊고 얕음이 나뉜 것이지

非是天公別點頭 특별히 하늘의 뜻이 아니로다

과학적인 합리주의와 천도(天道)보다는 인도(人道)를 중시했던 사상은 아마 세종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과학적인 합리주의는 장영실을 스게 하였고 천도보다 인도를 중시했던 것은 훈민정음 창제로 나아갔을 것이다.  

평생 스승으로 삼고 생각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행복일 것이다.  이 죽림사는 고종 5년(1868)에 훼철된 것을 1946년에 복원하면서 정재 윤홍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왕 역시 그렇게 했다.  왕이 적극적으로 자식을 가르치려고 했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것은 영조와 사도세자다. 올바른 도리로써 가르쳤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행하지 않으면 이어서 성을 내게 되고 이어서 성을 내게 되면 도리어 자식의 마음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서로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쳤듯이 왕 역시 인재를 구해 왕세자를 훈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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