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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14. 2019

사간원 (司諫院)

탄핵을 받았던 정언신의 소양 서원

최근의 일련의 사회적인 이슈로 인해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권력자의  언행이나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일반 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논박의 대상은 그릇된 정치일 수도 있고 부당, 부적한 인사를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지금 검찰과 언론이 하는 일을 했던 조선의 기관은 사간원이었다.  사헌부의 관원인 대관(臺官)과 병칭 해 대간(臺諫)이라 한다.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으며 사간원은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했지만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서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 있는 정치를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문경의 잉카. 마야 박물관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소양 서원은 숙종 38년(1712년) 처음 설립되었으며 서원의 일반적인 형태인 강학과 제향 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하고 있다. 고종 8년(1871)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존치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소양 서원은 나암 정언신, 민백당 김낙춘, 고산 남영, 가은 심대부 및 가은 이심 등 모두 5인을 배향하고 있다.  

나암 정언신은 바로 그 사간원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핵을 받았던 사람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지만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가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 후 복원되어 이곳에 제향 되었다.  

언론의 역할은 여러 번 언급해도 부족할 만큼 중요하다. 사간원은 간쟁, 탄핵, 시정, 인사 등에 언론활동을 했다.  당시 언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일컬어 ‘언론 양사(言論兩司)’라고 하였다.  간관의 자격은 당해원(當該員)과 그 내외 사조(內外四祖)에 흠이 없어야 됨은 물론이고, 강개(慷慨)한 언론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지금보다 더 철저한 기준에 의해 인물이 선택되었다. 

소양 서원의 동쪽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한류정(暵流亭)과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존승재(尊承齋)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2006년 6월 1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5호로 지정되었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필요하다. 정언신은 모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또 다른 인물로 소양 서원에 모셔진 심대부는 사간으로서 유계(兪棨) 등과 조(祖) 자의 묘호를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 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 해에 죽고 사후 신원되어 소양 서원에 제향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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