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신잡과 신헌 고가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왜군을 마지막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신립은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유럽을 휩쓸었던 기마병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신립장군은 그 힘으로 왜군에 맞서기 위해 탄금대에 진을 쳤다. 그렇지만 날이 도와주지 않았고 조총의 위력은 신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조선의 정예 기마부대는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모두 전사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총의 시대가 전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보통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만 기억하지만 그들에게도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신립의 형인 신잡은 진천에 흔적이 남아 있다. 동생인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하고 독송재 신잡은 임란이 일어났을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신하여 호성공신 평천 부원군에 봉해지게 된다.
신잡은 평주부원군 신화국의 장남으로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개성유수의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진천의 논실마을로 낙향한 후 백원서원을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다가 신립이 순절한지 17년이 지나 광해군이 즉위한 원년 1609년에 세상을 떠난다.
신잡 초상이 있는 곳 바로 아래로 내려오면 신헌 고택이 나온다. 신헌은 조선말 무관이지만 다양한 학문적 소양을 쌓았던 사람이다. 의사이면서 학문적 소양을 쌓은 사람을 유의라고 하듯이 무관이지만 정신적인 소양을 쌓은 사람을 유장(儒將)이라 부른다. 자신의 전문적인 분야는 당연히 알아야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쌓은 사람은 가치가 다르다.
조선말 신헌은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가 살았던 집이 진천에 남아 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 녹도(鹿島)에 유배되는 등 안동 김 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지만 철종의 부름으로 다시 받은 관직은 이순신이 역임했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신헌 고택 건립 당초에는 ㄱ자형으로 된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중문 등이 있었으나, 사랑채, 행랑채는 근년에 해체하여 진천읍내의 길상사를 중수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길상사에 있는 건물은 신헌과 관련된 흔적인 셈이다.
안채는 가운데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ㄱ자형의 안채 주변에는 동남쪽으로 중문과 광채가 있고, 주위로는 막돌로 쌓은 담장이 장방형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다.
신헌 고택에는 벌써 겨울이 온 것처럼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그가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한 것은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이기도 했다. 대원군의 폐쇄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문을 닫아걸었으나 앞선 기술을 등에 업고 온 일본으로 인해 개항되게 된다. 1876년 일본이 끌고 온 운요호(雲揚, 운양)는 원래 조슈 번이 영국에서 구매한 배로,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메이지 4년 3) 5월 일본제국 해군에 편입된 일본제국 해군의 포함(砲艦)이다.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영국에서 구매하여 끌고 온 운요호 포격에 대한 힐문(詰問)과 개항 요구를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중신 회담을 거듭한 끝에,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하고, 전권대신(판중추부사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조선ᆞ일본 양국 사이에 조약의 조인을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강화도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