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고산서원의 이상정
내년 예산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회를 통과하였다. 경제성장이 정체가 되고 민간에서 성장률을 높이기 힘들 것이 예상될 때 정부에서 주도하는 경제활성화는 필요하다. 오래 전이나 지금도 먹고사는 것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돈은 자율권이라는 측면이라고 이어지지만 돈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복지나 행복을 더해주지는 못한다. 문제는 자율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점에 이를 수 있는 소득이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안동에는 수많은 서원이 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은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자리한 고산서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상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이상정의 치정은 바로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연일 현감 부임 당시 연일은 날이 가물어 민심이 어지러웠으나 부임하자마자 비가 내려 현민들이 그 비를 사군우(使君雨)라 불렀다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고산 서원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신문(神門), 10칸의 강당, 3칸의 전사청(奠祀廳), 9칸의 백승각, 9칸의 동재, 3칸의 정사, 정문인 향도문(嚮道門), 14칸의 주사(廚舍) 등이 남아 있다.
앞에 보이는 정문인 향도문(嚮道門)을 지나면 나오는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원내의 행사 때 유림의 공론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재는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며, 백승각에는 서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이상정은 독서는 공맹정주(孔孟程朱)의 글을 주로 하였고 때론 밤새워 사색하고 혹은 여러 날을 침잠하여 반드시 깨우친 뒤에야 그쳤으며 마음에 체득한 바는 반드시 몸으로 행하였다.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자질에 따라 함양했으며 심술(心術)을 밝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는데 퇴계 학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이재(李栽)의 외손으로 일찍부터 그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이다.
돈은 사람들이 이웃을 따라 하기(Keeping up with the neighbor)을 걱정할 때나 약간의 웰빙과 문화생활과 관련이 있는데 친구나 이웃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보다 낮은 기본이 바로 먹고사는 일이다. 율려(律呂: 음악), 역법(曆法), 산수(算數)에 모두 통달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 심의(深衣),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관심이 많았던 이상정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에 오니 내년을 준비하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시골에 가면 나는 꾸리꾸리 한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많이 나더니 조금 돌아다니니 코가 마비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좀 익숙해진다. 안동 고산서원과 같은 이름의 고산서원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장성의 고산서원을 간 기억이 난다.
안동 고산서원에 모셔진 이상정은 1711년 1월 29일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나 1735년(영조 11)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전적, 병조정랑, 사간원정언, 사헌부감찰, 병조참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외관직으로는 연일현감, 강령현감(康翎縣監) 등을 지냈다. 이상정은 학문함에 있어 공부를 정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