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유교문화전시실
흔히들 꼰대 혹은 가부장적인 문화의 뿌리를 유교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적인 바탕이 되지 않은 유교문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유교문화는 다양한 장점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유교를 마치 자신들의 것인 것처럼 유리한 것만 차용하였으며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할 때 양반의 탐욕에 의해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물론 고루한 것이 없다고는 볼 수가 없다.
문경의 문화원은 새로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문경의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배움이 잇는 곳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문경문화원에는 문경 유교문화전시실이 갖추어져 있는데 문경의 인물을 배경으로 문경 유교문화를 알리고 있는 공간이다.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집안의 가장들 중 대부분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냥 그렇다고 하더라라고 하면서 근거 없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런 분들이 있다면 소학부터 시작해서 맹자, 공자, 대학, 중용, 주역 등을 토론해보아도 좋다. 그 근본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선비의 문화생활은 가부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도야의 마지막으로 음악과 예를 정통해야 하고 성품은 시를 배움으로 자극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확고해지며, 음악을 배움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 여기서 음악은 트로트가 아니다.
우리의 유교문화는 일본에 전해져서 차문화를 안착시키고 일본의 정신을 만들 정도로 깊고 강하돼 부드러우며, 엄숙하되 풍류와 멋이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는 것이 유교문화의 정신이기도 하다.
"독서의 순서는 먼저 '소학'으로써 근본을 배양하고, 다음에 '대학'및 '근사록'으로써 그 규모를 정하며, 다음에 '논어', '맹자', '중용', 오경을 읽고 그 사이에 '사기' 및 선현의 성리서를 의취를 넓히고 식견을 정밀하게 하되, 성인의 책이 아닌 것은 읽지 말며 무익한 문장은 보지 말라." - 율곡 이이
그러고 보니 지인이 물어본 책의 이름이 다른 이름이었는데 좋은 문구가 많이 들어 있던 책은 바로 성리서다.
민족의 선현의 말에는 꼰대 문화가 전혀 없다. 선비의 자기 수양은 외유내강하여 극기복례 하고자 하는 그들의 생활 모습 속에 채화되어 나왔으며 개인의 자기 수양을 넘어선 공동체를 위한 그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었다.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상대에게 권하지 않았다.
문경에 자리한 서원들은 모두 가보았다. 근암서원을 비롯하여 소양서원과 영월에 안치되었던 단종이 시해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낸 영월의 호장 엄홍도를 제향 하기 위해 선립된 의산 서원까지 말이다.
문경시 문경읍에 자리한 문경서중학교 교내에는 특이한 고건축물이 있기에 자세히 본 적이 있다. 그 건물은 옛 문경현아의 객사인데 관산지관은 인조 26년, 영조 11년에 각각 중수되었다.
문경의 유교문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이었던 이덕형으로 근암서원에 봉인되어 있고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김홍민 역시 근암서원에 봉인이 되어 있다. 지금은 대부분 키보드로 글을 쓰지만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가는 도구로 문인들의 가장 소중한 필기도구인 벼루는 가장 사랑하는 애장품이었다. 그 형태를 달라졌지만 유교문화는 글을 통해 이어지는 것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