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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4. 2020

왕산 허위의 사람 그릇

내 비록 죽을지언정 나라를 찾아야겠소.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시기에 경상북도에서 일어난 의병이나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다. 그래서 지역마다 대표하는 인물의 기념관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미에는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관을 비롯하여 생가터가 지금까지 보존이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영화에서 이정재가 말했던 것처럼 그날이 안 온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사람이다. 자신이 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고 기약 없는 삶의 여정이라 할지라도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소신을 하루아침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는 사과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 일본의 우경화는 과거 19세기를 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막내로 태어난 허위는 한말에 거유(巨儒)로 명망이 자자했던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운 전통적인 유생이었다. 둘째 형 허신은 문재(文才)가 출중하였으나 28세에 요절하여 뚜렷한 경륜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하나의 가문은 대부분 성향이 비슷한 것이 일반적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간혹 있다. 적어도 허위의 가문은 큰형부터 막내까지 조용히 탐구하고, 시대를 아우리는 모든 유학자들의 학설을 고루 배웠던 사람들이다. 

막내 허위를 가르친 허훈은 거의 20년 아래의 동생에 대하여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마는,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吾儒之學 我不讓君 四方之志 我不及君)”말을 남기기도 했다. 국권이 강탈당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 번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던 허위는 경상도·충청도·전라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지례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의 소식을 들었다.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면서 평생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고 항일 투쟁으로 일관했던 위대한 삶을 살았던 그는 한일합방이 되기 2년 전인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포천에서 체포된 허위는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똑똑한 사람 대부분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사실이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꼭 똑똑한 것은 아니다. 배움에는 때가 없고 배움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으며 배움에는 정해진 곳도 없다.  오래도록 쌓아 올렸던 그런 자리도 연연하지 않았으며 선산의 허위 가문은 대대로 쌓아 올린 명문의 전통과 영화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해 바친 것이 어찌 슬픈 가문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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