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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8. 2020

목민심서 (牧民心書)

19세기 진해에 설치된 진해현 관아

조선의 재정이 크게 흔들리고 세도가들이 급부상하게 된 시기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조정의 재정을 크게 약화시켰던때였다  . 게다가 국가에서 주도해서 세금을 걷던 것도 지역의 세도가들에게 넘어가면서 백성들의 수탈은 가속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쉽게 바뀌지 못했다.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예산이 넉넉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임꺽정의 난과 문정왕후 외척의 문제는 명종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문정왕후 사후에 나름 치세를 하려고 했으나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영의정 이준경이 명종 비인 인순왕후에게 물어 생전에 정해 놓은 덕흥 부원군(德興府院君)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입승대통(入承大統)시켜 후계를 잇게 하니, 이가 선조다.

미리 대비해야 된다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 같은 주장도 있었으나 이미 조선 조정의 재정은 넉넉하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자금이기도 하다.  이미 지역에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세도가들의 힘을 빼는 것은 쉽지 않았고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의 왕들은 흐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방 관리들의 폐해는 점점 더 심해져갔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을 추구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모든 힘은 세도가들에게 넘어간다.

마산, 진해, 창원이 각기 다른 지자체로 이어져오다가 창원시로 통합되고 나서 진해는 지역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오늘날 진해는 고려 초에 오늘날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대에 신설한 행정 구역이었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 행정적으로 지방 수령인 계수관(界首官)의 변화가 잦았으나 1896년에 경상남도 진해군으로, 그리고 1908년(융희 2) 창원군 진해면이 되었다.

진해현을 관리했던 진해현 관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성산길 54에 자리하고 있다.  현존 건물들이 각각 다른 구역에 나뉘어 위치하고 있어 건립 당시의 관아 배치를 정확히 알기 어렵기는 하지만  진해현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一자형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둔 평면 형태였다고 한다.

정조대의 인물이었던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라는 책을 기술한다.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1818년(순조 18)에 완성되었다. 수령은 언제나 청렴·절검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 받지 말며, 수령의 본무는 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완성한 1818년에서 16년이 지났을 때쯤 진해현 관아(鎭海縣官衙) 및 객사 유지(客舍遺止)는 1832년(순조 32) 진해 현감 이영모가 세웠다. 동헌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군령(軍令)을 출납하는 사령청이 있었고, 좌측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였던 객사가 있었으며, 동헌 앞으로는 말을 사육하던 마방과 지방의 형사를 관할하던 형방 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민심서를 보면 수령은 근민(近民)의 직으로서 다른 관직보다 그 임무가 중요하므로 반드시 덕행·신망·위신을 갖춘 적임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시대 수령은 오늘날 지자체장과 경찰, 검찰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해현 관아가 자리한 곳 바로 앞에는 석비 군이 있다. 석비 군은 지방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그 공적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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