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바다에 자리한 충무도서관
집에 다시 곱씹을만한이 없는 것은 아니만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빌리지 못해 조금은 답답한 시간을 보냈다. 5월부터 전국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은 부분개관하며 운영이 시작되었다. 도서관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어떤 곳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분위기도 느낌도 다르다. 통영하면 충무공 이순신이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충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많다.
역시 통영의 바다는 언제봐도 기분이 좋지만 통영을 갔다오면 몸이 녹초가 되어 한동안 컨디션이 가라앉게 된다. 5월에만 걸은 걸음수가 무려 230,000보에 이를 정도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km로 환산해서 보니 160km가 약간 넘는 거리였다. 언제 그렇게 많이 걸었지?
통영시립 충무도서관으로 들어가본다. 도서관을 많이 방문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참 발열체크를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제한적인 공간만 들어갈 수 있고 오랫동안은 머무를 수가 없다. 앉을 수 있는 좌석은 모두 한쪽으로 치워놓던가 마치 폴리스라인처럼 만들어두었다.
발열체크를 하고 자신의 상태를 적고 전화번호와 기본적인 정보를 적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마스크는 알다시피 필수다. 공공기관이나 대중교통, 비행기등은 이제 마스크가 없으면 이용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그래서 차에도 항상 여유분 5~6장은 갖추어놓고 다닌다.
이날 읽은 책은 옛 사람이 다시 한번 가르침을 주면서 가슴을 움직였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 책은 경주 최부잣집에 대한 책이었다. 400여년간 12대에 이르러 부호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그들의 삶을 자세히 엿볼 수 있었다. 물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다. 재산은 만석을 넘기지 않는다는 기준과 100리안에 사는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지 말고 소작농을 사람처럼 대했으며 찾아오는 식객을 잘 대접했다는 것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경영철학이 옛 방식이 아니라 사람마음을 움직일정도로 매우 효과적이고 미래를 내다보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같은 경주최씨인데 생활은 좀 다르긴 하다. 경주 최부잣집 400년 대부호의 삶은 조선 인조시절부터 시작이 된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땅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는데 이 땅들을 다시 먹고 살 수 있는 농경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이때 땅을 일구기 시작하는데 당시 볍씨를 바로 뿌리는 비효율적인 직파법대신 모를 심어서 벼를 심는 이앙법을 시도한다. 동시에 이앙법의 필수시설인 수리관계시설을 조성한다. 이앙법을 하면 장점이 망종까지 수확할 수 있는 보리를 심어 이모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양반들이 낮은 지위의 소작농들을 직접 대하는 대신 중간에 지주 대리인인 마름을 두어 관리하였던 관례에서 탈피했다. 마름의 문제는 이들이 소작권의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소작료를 떼가니 당연히 소작농의 밥그릇을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다 그들의 횡포에 불만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최부자는 마름을 제외하고 소작농과 직접 거래하며 마름의 소작료를 돌려주었다.
지금의 인력파견업체의 문제와 상당히 비슷하다. 최저임금이 올라가기 힘든 구조와 조선시대 소작농과 다를바가 없다. 게다가 최부자는 흉년이 들때 곡식같은 것을 빌리고 소작농에게 받은 문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갚을 수 있는 사람이면 문서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문서가 있더라도 갚지 못할 것이니 굳이 불안하게 만들필요가 있겠느냐는 말로 대신한다.
코로나19로 알겠지만 1분위의 소득자는 상관없이 소득이 늘었으며 5분위의 소득자는 정체되었거나 줄어들었다. 흉년같은 위기는 돈많은 지주나 양반들이 돈을 불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농민들이 내놓은 땅을 헐값으로 사들이며 그들을 피 빨아먹었다. 그러나 100리안에 사는 사람들을 굶기지 않을망정 최부자집의 가문은 흉년에는 절대 땅을 늘리지 말라고 하였다.
도서관 안에서는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통영의 바다를 보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책을 읽어본다.
나날이 땅이 늘자 재산이 만석을 넘었는데 넘은만큼 소작농에게 나누어주었다. 최부자집에 속한 소작농들은 해가 지날때마다 소작료가 작아지는 구조였다. 게가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식객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잘 대접해서 보냈는데 규모가 큰 사랑채로도 감당이 안되자 한줌의 쌀과 과메기를 들고 소작농이나 노비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은 가져온 쌀과 과메기를 보면 최부자집에서 보낸걸 알고 식객들을 잘 대접해주었다. 대접을 한 만큼 이들의 소작료를 내려주니 너도나도 식객들을 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12대로 내려온 지혜가 반영된 것이겠지만 이들의 경영철학은 배울 것이 많았으며 돈을 버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하나의 목적만이 아니라 미래에 생길 수 있는 이득을 동시에 보며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고 있었다. 게다가 식객들에게 접대를 잘하니 전국에서 찾아와 돈이 되는 양질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잘살 수 있는 방법을 항상 모색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 1884~1970) 은 그 수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하는데 독립자금으로 지원하고 그 나머지 재산은 국가를 위해 1947년 마침내 대구대학이 설립됐으며 최준은 재단이사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몰두하였다. 대학운영이 여의치 않자 아들에게도 스스로 알아서 잘살라하면서 삼성 이병철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넘겼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박정희에게 넘어갔고 이는 박근혜에게 비빌언덕이 되어주었다. 고인은 마지막 유언으로 "가진 재산을 모두 희사(남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의 재물을 내놓음)해서 도둑이 집에서 훔쳐갈 것도 없으니 집의 대문을 활짝 열어라"을 남겼다. 이로 인해 경주 최부자는 전설이 되었다.
돈은 벌어야 될 목적이 명확하면 방법이 생기고 그 방법이 정직하면 망할일이 없다. - by 나는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