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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4. 2020

한국전쟁

음성 감우재 전승기념관

북한의 돌발행동으로 잠시 시끄러워지기는 했지만 김정은의 보류 결정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에 있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이념전쟁으로 오랜 시간 소모적인 논쟁과 지역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냈다. 2,00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성인의 대열에 들어서는 2020년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만들어낸 이 땅의 이념대결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를 군대에서 보내야 했던가. 음성 감우재 전승기념관에는 무궁 수훈자의 공적비도 자리하고 있다.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침공하는 한국전쟁에서 나라와 국민을 지키신 분들을 기리는 비다. 

최근 북한에 날려 보낸 삐라로 인해 다시 한번 시끌시끌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어 "삐라/비라(ビラ)"가 한국어로 들어와서 사용되다가 자리를 잡았는데 일본어 비라는 전단지라는 의미이지만 경음화된 삐라는 한국에서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군사적인 목표물은 여러 개가 있는데 군의 사기를 누르는 것도 군사적인 목표물에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30만 명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싸우려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었다.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참선이나 석유 정제소 같은 시설들이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북한군의 병참선은 끊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공습은 1944년에 시작되었는데 연료가 절실하게 필요한 독일 육군과 공군의 연료를 고갈시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방어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다. 독일에 투하된 폭탄 중 83퍼센트(총 140만 톤)가 전쟁 마지막 해에 집중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70주년에 그 흔적을 찾아와 보았다. 감우재(甘雨-)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과 무극을 잇는 국도 제37호선 상의 작은 고개(해발 240m)이다. 이 고개의 정상 부근에 있는 전승비는 6.25 동란 중인 1950년 7월 9일부터 닷새 동안 벌어진 격전을 기리기 위해 1986년에 건립되었다

이 장갑차는 차장용 큐폴라에 12.7밀리 기관총 1정 혹은 7.62밀리 기관총을 한정 탑재하고 있으며 북한 특작부대의 도시지역 침투를 염두에 두고 도입, 운용했던 장비다. 70주년을 맞이한 2020년 그리고 2050년이 되면 100주년이 될 것이다. 100주년에는 전쟁이나 이념 다툼이 아닌 의미 있는 일을 기념하는 해가 되었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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