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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1. 2020

왕권의 의미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사찰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왕권 사회에서도 민심은 상당히 중요한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SNS 등으로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먹고사는 것이 기본이 되는 의식주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2020년은 집이 민심의 바로미터로 작용을 하고 있다. 유목민족이 아닌 이상 사람은 의식주가 갖추어져야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다. 

공주의 제민천은 열린 공간이다. 요즘의 트렌드는 실내시설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대신에 열린 공간이며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 기회가 적은 곳으로의 여정이다. 제민천의 천변길은 언택트 여정길이다. 

유구천 옆에는 백제시대에 큰 규모로 만들어졌던 대통 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대통사지가 남아 있다. 사찰은 민심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왕권이 얼마나 확립이 되어있는지 알리는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대규모의 사찰을 짓는 것은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에 국가가 부강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고구려 등의 압박에 밀려서 한강 이남으로 수도를 천도한 백제는 공주를 거쳐 부여까지 이르게 되었다. 수도를 비교적 안전한 곳에 만들어놓고 다시 한번 국가의 중흥을 꿈꾸었다. 동시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중에 대통사도 있었다. 현재 대통사는 공원처럼 조성이 되어 있는데 온전히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당간지주만 있으며 기단석등이 있지만 어떤 건물에 사용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백제의 부활을 이끄는 것을 보고 아들 성왕은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한 번의 도약을 꿈꾼다.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하고 중국, 일본과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백제의 성왕이 527년(성왕 5) 또는 525년(성왕 3)에 지은 사찰인 대통사는 한국에서 그 위치가 확실히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찰로, 백제 성왕의 왕권강화 의지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527년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를 위하여지었다는 설과 525년 아버지 무령왕의 명복을 위해지었다는 대통사는 이제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왕권강화와 사찰의 건립 등으로 민심을 다지던 성왕은 553년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554년에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하고 백제군도 대패하면서 위기를 맞이하며 국가의 존망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되어버린다. 


by. P.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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