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어렵다.
기석은 일상처럼 대청마루에 앉아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하나 꺼내서 한 모금 마셨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살면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로 인해 믿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과연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의 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방금 꺼낸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방에서 그녀가 나왔다.
마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주민등록등본을 내 옆에 놓으면서 자신의 학생증도 같이 놓았다. 대학교를 가지는 않았지만 기석의 기억력은 남달랐다. 엄마가 일전에 보여주었던 아빠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했는데 그 정보와 주민등록등본의 그 사람의 숫자는 같았다. 관심이 없는 것처럼 잠시 흩어보고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말없이 냉장고에 가서 캔맥주를 가져와서 캔을 따고 마셨다. 기석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 모금 마시고 답을 하듯이 말을 했다.
"알아요. 제 나이에 먹으면 안 되는 건데요. 올해에 조금 힘든 것이 있어서 처음 마셔보니 그냥 기분전환이 되더라고요." 말을 듣고 나니 그녀의 아빠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것이 다시 연상되었다. "그래도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냐? 뭐 나도 어릴 때 막걸리를 마셔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보름달이 밝게 밤하늘을 밝게 수놓고 있었다. 가끔씩은 토끼가 달에 있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문경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그렇게 공부를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더 배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집에는 가져갈 만한 귀금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눈빛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불편하겠지만 잠시 같이 살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알아요?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 보리 생산량이 감소한대요. 온도가 4.5도 상승할 경우 보리 생산량은 17%까지 감소한다고 하니 맥주값도 비싸지겠죠?"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이상한 정보를 아는 그녀였다. "별걸 다 알고 있네. 내가 사는 동안 맥주값이 비싸져봐야 얼마나 올라가겠어."
"물론 그렇게 올라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맥주 한 캔 정도만 먹으면 적당하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런데 도시와 다르게 이곳은 별과 달이 참 밝네요."
"몰라 나는 그냥 이런 밤의 모습이 일상이라서 도시의 모습이 어떤지 모르겠어. 난 여기서 사는 것이 참 좋아. 굳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가끔씩 돌아보는 이곳이 좋아."
지영이는 어린 시절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병약한 엄마를 보살피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서도 그녀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다. 차분하지만 무언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녀의 분위기에 그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빠는 하는 일이 뭐예요? 대학교를 다니는 것 같지도 않고 어디서 일하는 거예요?"
"그냥 작은 사과농장 하고 있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농장의 사과를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
"와~ 그럼 농장주네요. 많지 않은 나이에 사업을 한다는 것은 멋진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엄마가 운영하던 농장을 그대로 운영하는 것이었지만 홀로 운영한 것이 벌써 3년이 지났으니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10년은 같이 농장을 운영했으니까 짧은 시간은 아니지. 그런데 너는 학교 전학은 한 거야?" 기석의 말을 들은 지영은 접시에 있는 오징어를 씹으면서 말했다. "했어요. 물론 오빠가 받아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까. 호타루가 생각나네요."
"호타루? 그게 뭔데?"
"일본 드라마예요. 저 드라마광이거든요. 영드, 미드, 일드 등 안 본 게 거의 없을 정도예요. 이 집의 분위기와 마루는 딱 호타루와 같아요. 저처럼 트레이닝 복을 입고, 한 손엔 맥주를 또 다른 한 손엔 건어물을 든 여자가 거기서 등장하거든요."
"말만 들어도 정말 할 일 없는 여자처럼 느껴진다."
이후 둘은 말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상해보이는 그녀였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삶에 들어온 그녀는 이상해보였지만 모호하면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