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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5. 2021

조선의 왕족

예산에 남겨진 화순옹주의 흔적

보통 왕족이라고 하면 정말 누구나 부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렇게 산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특히 비극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중에 사도세자도 포함이 된다. 영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왕족이라 함은 완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나마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보다는 덜 치열했다. 사도세자가 딸로 태어났다면 영조의 이쁨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화순옹주의 삶 자체는 불행스러웠지만 영조의 사랑은 듬뿍 받았다. 

이곳에는 화순옹주의 옹문이 남아 있다. 건물은 사라지고 기둥터만 남아 있는 곳이다. 화순옹주는 글과 글씨로 이름을 날린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이기도 하다. 화순옹주의 죽음은 사도세자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조는 둘째 아들 이선(사도세자, 1735~1762)을 쌀뒤주에 가둬 죽였다. 1762년 여름의 일이다. 

1732년 (영조 8)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과 혼례를 치르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1758년 김한신이 불과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에 탁 트인 풍광이 있어서 돌아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화순옹주의 어릴 때로 돌아가 보면 영조와 후궁인 정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사실 둘째 딸인데 장녀라고 볼 수 있다. 화순옹주의 언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 역시 왕세자로 책봉되고 난 뒤 9살에 세상을 떠났다. 즉 화순옹주와 사도세자는 비슷한 운명에 처했으며 제명에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된 것도 비슷하다. 

화순옹주의 옹문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은 열린 곳이다. 완벽함을 추구했던 영조 역시 인간일 수 밖에 없었다.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를 잃게 된 주된 요인이 소론과 남인에게 있다고 굳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남인과 소론 일파는 궁녀인 순정을 이용해 정빈 이 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였고 화순옹주 역시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던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화순옹주를 너무나 사랑했던 영조는 남편인 김한신이 죽고 나서 제발 살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화순옹주가 죽기로 마음먹고 곡기를 끊었을 때 아버지인 영조가 체면 같은 것을 버리고 미음을 먹으라고 했는데 화순옹주는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영조는 그걸 불효라고 생각하고 열녀문 내리길 거부했다고 한다. 

조선의 왕족이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는 있다. 세상의 일이 맘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일 또한 쉽지 않은데 왕족은 더 그러했었다. 

남편인 김한신이 죽고 난 후 영조는 체면을 버리고 그녀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 "옹주여, 제발 숟가락을 들라." 아버지의 간청에, 미음 죽 위에 놓여있는 그 숟가락을, 옹주는 마지못해 들었다. 죽을 입에 넣는 듯했으나 그녀는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영조의 딸은 총 8명이 있었는데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다. 남편이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순옹주가 175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불과 4년 뒤인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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