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바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이곳에서 시작된 물은 바다로 나갈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물이 생각이 있어요?"
"우리는 모두 물과 같은 존재란다. 저 아래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이 언젠가는 나나 세연이한테도 올지도 모르지. 그래서 인생을 강물의 여정이라고 부르는 거야. 세연이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물이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마지막 종착지인 바다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흘러가지 않듯이 사람도 태어나서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지 않는 거란다."
윌리엄은 특이한 외국인이었다. 아니 그때는 특이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어떨 때 보면 한국적인 것을 넘어서 마치 인생을 통달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사서삼경도 잘 알고 있는 특이한 외국인이었다. 가끔씩 영어나 스페인어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국어로 수업을 했었다. 한국어를 제대로 알고 나서야 다른 언어도 이해가 간다면서 말이다.
"저에게는 어려운 말이네요. 그런데 어렴풋이 알 거는 같아요. 저도 언젠가는 윌리엄처럼 나이가 먹는다는 거죠?"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어디로 갈지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말아라."
"그런데 제 주변에서 저랑 비슷한 나이의 여자애들은 상당수가 교육을 받지 않더라고요. 가끔씩 저를 이상하게 보기도 해요."
"그것에 대해서는 너무 깊게 생각은 하지 말고 세연이가 갈길은 생각해. 물론 한국사람들이 보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보다 더 옛날 독일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공부했던 여자 과학자도 있었어."
"진짜요? 독일이라는 나라가 유럽에 있는 나라 맞죠?"
"응 리제 마이트너라는 과학자야. 결과적으로 그녀의 수학적 계산이 파괴적인 무기를 만드는데 쓰였지만 그녀는 인간미를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어."
"파괴적인 무기가 뭐예요?"
"세연이는 잘 모르겠지만 원자폭탄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말 넓은 곳을 아예 없앨 수도 있는 무기야. 리제 마이트너는 중성자 충돌이 핵을 두 개로 갈라지는 핵분열(Nuclear Fission)을 알아냈거든."
"어려워요. 핵분열은 뭐예요."
윌리엄은 옆에 있던 찻잔에서 물을 한 방울을 탁자에 부었다. 그리고 마른 찻잎을 뜨는 차도구를 이용해 물방울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 물방울이 두 개 갈라져서 다시 둥글게 뭉치는 것 같은 게 분열이야."
"아 그렇구나."
"뭐 어려운 이야기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우리 지난번에 노자 이야기를 했었지? 기억나니?"
"예 그거 때문에 한참을 생각했어요. 굽은 것 속에 온전함이 있고, 구부림 속에 곧음이 있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가서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을 이야기해준 거야. 상대방이나 사물 또한 상대적인 거야. 일방적인 것은 없단다."
윌리엄의 수업은 물로 시작해서 노자로 끝이 났다. 때론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혼자서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느낌이었다. 리제? 그 여자는 조금은 궁금했다. 이곳 청학동에서는 대부분 남자애들만 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는 청학동의 계곡을 걸어서 내려갔다. 계절의 변화는 신기하기만 했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나무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는 물이 투명한 몸을 가진 요정처럼 바뀌어서 같이 걸어갈 것만 같았다.
걸어서 내려가다가 바위에 걸터앉아서 발을 물에 담가 보았다. 투명한 물속의 발은 살짝 더 길어 보였다. 어제 익호 아저씨는 편한 사람이었지만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와 윌리엄이 한 말에 공통점이 있었다. 둘이 같이 누군가에게 배움을 받았는지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두 사람은 다르지만 익호 아저씨와 윌리엄이 서로 아는 사이이니 이야기하다가 그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거기 있는 게 세연이니?" 뒤를 돌아보니 묵계마을에 사는 할머니였다.
"예. 저 맞아요."
"거기서 뭐 하고 있니? 밥은 먹었어?"
"아니요. 좀 전에 윌리엄에게 수업받고 내려와 있었어요."
"그럼 나랑 같이 가서 밥 먹자."
할머니의 남편분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서울로 이사 가서 정착을 했다. 그래서 홀로 살다 보니 같이 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은 자연 속에서 채취한 것들로 만든 것이어서 속에 부담이 없어서 좋기는 했다. 할머니가 가장 잘하는 반찬은 열무김치와 물김치였다. 진짜 시원한 맛이 너무 좋아서 엄마도 가끔씩 열무김치를 받아가곤 했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길가로 올라갔다. 할머니는 이날 캔 감자를 바구니에 담아서 들고 있었다. 이날은 찐 감자와 함께 열무김치를 먹었다. 최근에 먹은 음식 중에서 가장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그때 먹은 감자열무 저녁밥(?)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