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에 자리한 영조의 태실
사람의 생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기에 자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성과 위에서 자식이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내길 원하기 때문에 자식 욕심이 있다. 누군가가 있어야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알려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조선왕조에서 자식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왕으로 조선 전기의 태종과 조선 후기의 영조가 있다. 두 명의 왕 덕분에 세종과 정조가 이룬 것이 많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태종은 이미 기반이 있으며 정당성이 확보되었다면 영조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청주에 가면 영조의 태실이 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가볍게 취급되었다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다시 격식을 갖추어서 태실을 정비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가혹한 자기 관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길이 혹독했는데 그 길을 사도세자는 걷는데 엄청난 힘겨움에 버거워했다.
영조 태실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조그마하게 이정표가 붙어 있다. 이곳에서부터는 잘 알아서 찾아봐야 한다. 골목이 좁은데 자신의 감각을 믿고 잘 찾아서 올라가면 된다. 수풀이 우거지게 되면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듯하다. 다행히 겨울에 와서 비교적 찾기가 용이했다.
영조 태실로 가는 길목에는 성모재라는 청주시 향토유형 제7호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32년 부강에 살았던 부자 김학현이 지은 재실이라고 한다. 재실을 지을 수 있는 집안은 부유한 집안이다.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고 중앙에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부합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한 건축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이제 다시 영조 태실을 보기 위해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면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올라간다. 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어머니와 연결된 생명력이다. 아버지의 유전자에 어머니가 자신의 몸에 있는 칼슘과 모든 것을 주어서 아이가 성장한다. 그렇기에 남자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손을 남겨서 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가 태실이다.
드디어 영조의 태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대왕 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하고, 이 경계 밖의 수목을 기르는 곳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어머니는 무수리 최 씨. 무수리는 궁녀의 하녀로 궁의 계급 중에서 가장 하층이었다. 그런 신분적인 한계를 이겨내기 위한 것과 함께 그는 탕평을 뿌리내리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재위 52년 동안 모두 3458회의 경연이 열렸다. 이는 1년에 평균 66회, 한 달에 5회 꼴이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인 1695년(숙종 21)에 무성리 뒷산에 태를 묻고 태봉이라고 하였다. 장희빈에게서 나온 형 경종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뒤인 1729년 (영조 5)에 왕의 태실 규모에 맞도록 가봉하였다. 태실 앞에는 1694년 9월 13일 인시에 태어난 왕자 아기씨 태실이라고 한 초기의 비와 가봉 후에 주상전하 태실이라고 한 태실비가 있다.
일제하에 강제적으로 항아리를 서울 창경궁으로 옮긴 후에 크게 파손되었는데 이후 1982년에 흩어진 석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복원하였다. 태실을 가봉할 때의 기록문은 '영조태실설난간조배의궤'는 청주고인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종과 영조가 왕족이나 인척에게 냉혹한 군주처럼 보이나 백성들에게는 사랑이 지극했던 군주였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영조는 암행어사 제도를 활용해 자신의 정책과 정치적 이상이 궁과 한양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감시했다. 영조는 스스로에게 자기 절제를 강요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의 삶의 기준은 일탈을 일삼는 사도세자와의 비극을 낳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본다면 영조는 행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을 독살한 동생, 왕통이 아닌 천한 무수리의 아들,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으며 살았지만 명석했으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좋게 만들기 위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