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Eve

크리스마스에 대한 소소하지만 따뜻한 사전

누가 버리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운 색감의 장미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곳에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은지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자그마한 손으로 눈을 헤치고 장미꽃을 들었다. 이 추운 날에도 장미꽃은 시들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은지는 장미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같은 색인 것 같은데 옅은 색부터 짙은색까지 다양하게 하나의 꽃에 피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은지는 눈 속에서 발견한 장미꽃을 소중하게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빌라 1층의 집은 방이 두 개가 있는 작은 집이었다. 작가를 꿈꾸던 아빠는 지방으로 일을 다니기 때문에 한 달에 2~3번 집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은지는 방을 돌다니다가 먹을 것을 챙겼다. 소시지 두 개와 빵을 손에 쥔 은지는 작은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소시지 하나가 툭 떨어져서 서랍장 밑으로 굴러들어갔다. 은지는 소시지를 찾기 위해 손을 넣고 더듬거리다가 책 같은 것을 발견했다. 은지는 책을 끄집어내서 보았다. 연보라색의 다이어리는 시간이 오래되었는지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아빠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은지는 호기심이 갔다. 첫 장을 열자 세상에 어딘가에 있을 따뜻한 온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이야기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은지는 안쪽에 있는 소시지와 빵, 음료수를 들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랜턴을 이마에 달고 은지는 누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은지는 항상 매년 이브는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1894년. 조선의 크리스마스


1894년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힘든 한 해였다. 지방의 탐관들은 착취하였고 이에 못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난 들고 일어섰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한 해였다. 추운 겨울날에 시작된 운동은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번졌다. 사발통문을 돌리면서 파죽지세로 몰아쳤지만 그 해 말에 공주의 우금치라는 곳에서 대패하면서 농민군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죽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조선에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대한제국황실에서 처음 선물을 주고받으며 이 땅에 그 문화를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미 전에 선교사를 통해 크리스마스에 찾아오는 산타와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명성황후가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와 함께 선물을 주고받은 것이 그때였다. 은지는 동학농민운동과 크리스마스가 연상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세상은 많은 것들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한 영화 러브 액츄얼리


은지는 사실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를 보아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스토리가 무언가 따뜻한 것도 같지만 왜 저렇게 힘들게 사랑을 할까란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다시 다이어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일기인가 아니면 책으로 쓰려고 했던 것인지 조금은 의구심이 들었다.


세상에는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도 있고 사랑에 확신하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보여주는 책 혹은 영화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최애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였다. 영화 속 작가로 등장했던 제이미 베넷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소리 없는 고백, 여기에 노래까지 모든 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그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다. 마크가 소리 없이 고백했던 문구 "To ME, You Are PERFECT"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세상은 따뜻해질 것이다.


동지와 크리스마스의 시작


크리스마스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누군가 말하는 대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일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을 기념하기 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이교축제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를 기념하여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한 여름의 절기 하지는 낮의 시간이 가장 긴 때이지만 낮시간이 줄어드는 때였고 한 겨울의 절기 하지는 밤의 시간이 가장 긴 때이지만 밤시간이 줄어드는 때다. 즉 태양이 더 높이 떠올라 비추어주는 곳이 넓어지고 길어진다는 의미다. 꺼지지 않는 생명이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트리는 상록수로 사용이 된다.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기는 나무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적합하지 않다. 옛날 이스라엘에서의 하루는 해가 질 때에서부터 다음 날 해 질 때까지를 eve라고 불렀으며 보통은 크리스마스 저녁때까지 즐겼다.


은지는 갑자기 아빠가 전에 사놓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각났다. 이불속에 나와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얼마 전에 꺼내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았다. 나름 전구가 리듬감을 가지고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은지는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스어에서 코로스(Choros)라는 의미는 합창이다.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합창이라는 의미는 같이 즐긴다는 의미가 아닐까. 캐럴이라는 단어는 그 코로스에서 기원하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주는 선물과 빠질 수 없는 캐럴은 크리스마스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유명한 가수의 노래도 있지만 그 가사가 좋아서 좋아하는 캐럴도 있다. 딸인 은지에게는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캐럴을 즐겨 틀어주었다. 그때마다 딸은 정말 산타 할아버지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냐며 물어보았다. 사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모른 채 할 뿐이지만 말이다.


아빠는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 약간은 배신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캐럴은 개인적으로 좋아하기에 은지는 넘어가기로 했다.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구두쇠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할 정도로 많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는 못했다. 1843년에 찰스 디킨스는 어린이 고용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읽다가 빈민층 아동과 청소년들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공감능력이 있었던 찰스 디킨스는 그 현실에 큰 충격을 느꼈고 이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 작품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구도쇠 스크루지의 이야기다. 돈을 왜 버느냐를 알지 못한다면 그건 비극일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비극에 관심이 없었으며 구두쇠로 일관했던 스크루지는 자신에게도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랑조차 자신에게 이르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래도 스크루지에게는 따뜻한 마음의 조카와 죽어서까지 쇠사슬에 묶인 몸을 끌고 나타난 동업자 말리까지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면 친구 스크루지가 힘들게 살게 놔뒀을 텐데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까지 해준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다른 삶을 살 기회는 있다.


은지는 다시 생각해보니 스크루지는 많지는 않지만 그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가난했지만 순수했고 현재를 살아가며 죽고 나서는 그 사람의 발자국의 색깔을 보여준다는 아빠의 표현이 좋았다.


더 읽고 싶었지만 eve의 자정시간이 벌써 다가왔다. 2년 전부터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안 은지지만 굳이 1층의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는 아빠의 그 마음을 지켜주기로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르는 빨간색 옷을 입고 들어와서 걸어놓은 수면양발에 무언가를 넣어놓으면서 자신만의 감성을 지키려는 그 모습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랜턴의 불을 끄기 전에 은지는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자 뒷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소소하지만 따뜻한 사전. 이불위에 걸린 수면양발에는 가져온 장미가 꽂혀 있었다.


The end.

https://youtu.be/nlR0MkrRk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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