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정이 낙향하여 은거했던 봉화 옥류암(玉溜庵)
허 씨 집안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제각기 재능이 있었다. 맏이인 이름난 문장가로 알려졌는데 허성(許筬)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이기도 했다. 둘째인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써서 유명세를 얻었으며 그 아래 동생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역시 풍부한 감성을 그때그때 곧바로 시로 써서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알려졌다. 막내는 자유분방하게 살기를 원하며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다.
이날은 봉화군에 자리한 봉화옥류암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봉화옥류암에 은거해서 살았던 사람은 바로 허 씨 집안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허 씨 집안 형제자매 중 임진왜란을 모두 겪게 될 운명이었으나 둘째인 허봉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를 의지했던 허난설헌 역시 한 맺힌 부용꽃 같은 운명을 살다가 오빠가 죽고 난 1년 후인 15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고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봉화 옥류암으로 가는 길에는 시와 소나무가 있어다. 홍유정이 봉화 옥류암은 태백산령 문수산(文殊山) 아래에 낙향, 은거할 때 세운 정자로서 2007년 12월 31일 경북문화재자료 531호로 지정되었다.
굽이굽이 돌아서 들어오면 아담한 작은 정자가 나오는데 이곳이 봉화 옥류암이다. 명문가였지만 허 씨 집안의 형제자매 중 명대로 산 사람은 맏이인 허성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2년 전에 명확하게 분석했지만 임진왜란은 막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외손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봉화옥류암을 짓고 이곳에서 벼슬길에 다시는 나아가지 않았던 홍유정이다.
홍우정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는데 해주관찰사 최기(崔沂)가 홍우정이 지은 시를 보고는 그 재주에 반하여 딸과 혼인케 했다. 이후 161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장인인 최기(崔沂)가 해주옥사의 역적 괴수로 몰려 처형되고 이에 연루되었고 천안에 유배되어 8년을 살게 된다.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정자 때문인지 몰라도 정자와 종택 사이에는 이렇게 작은 연못이 있는데 물이 사시사철 흘러 연못을 채우고 있으며 주변에도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정자는 1637년에 건립하여 1756년에 와가(瓦家)로 중건한 후 미수허목(眉叟 許穆)의 전액(篆額) 현판과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기문을 걸었다고 하며 187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옥류암으로 들어가 본다.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은 기록 등은 조선시대 정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태백오현으로 추앙받는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였던 역사적 장소로 알려져 있다.
외가가 허 씨 집안이라면 친가 쪽의 할아버지는 선조 때 홍주 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뒤의 어수선한 틈을 타고 충청도에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원부원군(寧原府院君)에 봉해진 홍가신(洪可臣)이다. 이몽학의 난을 이야기로 만든 영화가 차승원주연의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이다. 초야에 은거하면서 살던 홍우정에게 왕자의 스승인 대군사, 봉화현감, 황간현감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다.
옥류암에서 머물면서 그는 인생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옥류는 물의 근원을 의미한다. 물의 근원은 사람의 근원이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릴 때 가장 큰 가르침은 집안 어른들에게서 시작이 된다. 집안 어른들에게서 큰 가르침이 없다면 정신적인 뼈대를 만들기란 쉽지가 않다. 여러 사람들의 인연이 끈이 이어져서 홍우정에게 왔고 홍우정은 옥류암에서 달관한 듯 살면서 인생을 보냈다. 옥류암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며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 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으며, 정자의 우측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종택을 2006년에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