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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3. 2023

서얼의 꿈

홍주성역사관에서 만나보는 이몽학과 홍가신

1591년 봄,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과 함께 돌아왔다. 당시 황윤길은 정치적으로 서인(西人)이었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속해 있었다. 사실 조선후기에 정치적인 문제와 양반이 몰락하게 되는 기점은 조선 선조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이 잘살게 하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무조건 상대당이 말하는 것을 맹목적인 반대를 하면서 정치적인 영향을 키우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때였다. 일본을 갔다 온 황윤길은 당시 일본에서 겪은 내용을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올렸다.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나이다."

홍성의 홍주성역사관에 가면 충청지역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 이몽학과 그를 홍주성에서 막았던 목사 홍가신(洪可臣),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의 이야기가 있다. 이몽학은 전란이 한참이던 1596년에 한현 등과 동갑회를 조직하여 홍산(현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왕실의 서얼 출신이지만 한량처럼 살다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를 전전하면서 살았다. 

그가 난을 일으키기 4년 전 김성일은 지금의 정치인과 비슷한 말을 이어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자는 선조의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나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 말은 책임감이 전혀 없는 말로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1596년(선조 29) 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林川郡)·정산현(定山縣)·청양현(靑陽顯)·대흥현(大興縣)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이곳 홍주성(洪州城)까지 오게 된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10일 천하로 끝이 나게 된다. 

이몽학의 난을 잠재운 홍가신은 청난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박명현과 충청수사 최호는 2등, 임득의 신경행 등은 3등에 봉해졌다. 충청수사로 부임했던 최호는 충청도의 서해를 방어하는 자리에 있다가 이몽학의 난을 평정했으나 다음 해인 1597년에 이순신이 파직된 후 백의종군하게 되면서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그의 휘하에서 종군하다가 정유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뒤로 도주하자 앞서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나머지 군사와 함께 바다에 수몰된다. 

이몽학은 죽었지만 그 여파는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다. 당파싸움으로 최소한의 전쟁준비를 하지 못한 여파는 백성들에게 그대로 미쳤다. 반란군들은 흩어져서 도망가다가 의병장 김덕령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원래 의병출신이었음을 안타까워해하며 그들을 풀어준다. 그 행동으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고 김덕령과 곽재우를 역적으로 몰아가려는 정치세력으로 인해 선조는 그들마저 죽이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류성룡은 앞서서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김덕령은 역적으로 몰려 죽고 곽재우는 전쟁 이후에 벼슬을 맡았으나 정치와 군정의 문제점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선조의 왕명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그를 유배 보냈으며 류성룡은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징비록을 저술한다. 

홍성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 가족의 목상이 남아 있다. 마치 지역을 수호하는 수호신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홍주성에는 청난원종공신의 공적과 인적 사항을 정리한 청난원공신녹권이 남아 있다. 청난공신은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신하들에게 내린 칭호이며 그중에는 징비록을 저술한 류성룡도 포함이 되어 있다. 

홍성 서부면 판교리에 가면 정충사라고 있는데 청난공신 임득의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으로 충남문화재자료 제40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에 남겨진 자료 중 많은 자료가 한원진과 관련된 자료다. 영조대의 인물로 과거급제나 관직의 높낮이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 연구를 했던 사람이다. 그 역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아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후 홍성 양곡사, 제천 황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일들도 마치 도미노처럼 이어질 때가 있다. 한 사람의 군주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죄 없는 수많은 사람과 결정권 자체가 없었던 백성들의 죽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지만 실제 배우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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