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노량에서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다.
드디어 명분이 생겼다.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어도 끝내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람은 명분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명나라와 협상하면서 조선을 압박해 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것이다.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끝낼 명분이 생긴 것이다. 남해안에는 사천의 선진리 왜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왜성을 쌓아두었다. 보급이 끊긴 왜군은 곳곳에 왜성을 쌓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즉시 전군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순천만 해양정원이 자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천왜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 성안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조선땅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명나라의 진린제독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낸다. 이순신은 뇌물을 보낸 고니시의 의도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빠져나가겠다고 그동안 해상전투를 한 이순신에게 뇌물을 줄 정도로 막다른 길에 이른 것이다.
이곳 노량항은 순천왜성과 당시에 일본 수군이 머물러 있던 사천과 중간쯤에 위치한 곳이다. 광양만의 안쪽에 자리한 순천왜성은 이순신이 전략을 펼치기에 무척 힘든 곳이었다. 그렇지만 고니시가 사천에 있는 일본 수군을 불러들이기 위해 순천왜성으로 공격을 나서게 된다. 전라 좌수영에서 출발해서 순천왜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순천왜성에서 광양을 거쳐 나오면 바로 이곳 남해군과 하동군 사이의 노량에 도착하게 된다. 사천에 있었던 시마즈는 고니시의 구원요청을 받고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성을 향해 출발한다.
해저무는 시간에 하동의 노량항이라는 곳에 가보았다. 노량마을 나루터는 대가야시대로부터 어선의 기항지였으며 문모라성으로 들어가는 도선장이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과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지만 일본과 교역한 최대의 무역항이자 국제항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었지만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조선시대에 조창을 이곳 노량에 옮겨 상항과 하항에 두 개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광장을 2023년 5월에 새로이 단장하였다고 한다. 남해대교 개설로 도선은 사라져 버렸다.
왜군의 구원군이 출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수군을 이동시켜 이곳 노량항에 집결시킨다. 해전에서 밤에 전투가 벌어진 것은 노량해전이 유일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좁은 해협에 모인 조선 수군은 왜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우후죽순 침몰하였는데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에 화공으로 왜군의 함대가 불타기 시작했다.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군이 함선이 이 좁은 해협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선수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노량항에 가보면 알겠지만 물결의 흐름이 휘몰아치듯이 흐르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당시 노량의 밤바다는 마치 해가 뜬것처럼 환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길이 이어지는 노량은 수군재건의 길이며 백의종군길로 알려져 있다.
필사적으로 조선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왜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에 근접하게 되었고 왜군이 쏜 총탄이 이순신에게 다다르게 된다. 그가 남긴 말은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전방급 신물언아사(前方急 愼勿言我死)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알려진 것처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후에 각색된 것이다.
때론 어떤 일들은 마침표가 필요하다. 전쟁이 그러하다. 명분을 만들고 조선땅을 유린하던 그 왜군을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이순신은 이곳에서 끝까지 왜군을 섬멸하고 전쟁의 마무리를 짓는다. 그날 죽음의 바다였던 노량의 바다에서 그날의 시간을 되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