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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8. 2024

조선의 혁신, 수차(水勢)

낙동강이 흐르는 의성군에서 만나보는 박서생과 수차

지금은 기계가 잘 발달되어 있고 대형댐도 곳곳마다 설치되어 있으며 저수지등의 관계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농사를 짓는 것이 수월하며 적은 인력으로도 할 수가 있었지만 과거에는 모든 것이 인력으로만 채울 수 있는 것이어서 생산량이 상당히 낮았다. 낮은 생산량은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수고로움과 함께 배고픔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벼농사를 할 때 물을 끌어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육쪽마을로 유명하고 마늘이 들어간 음식으로 잘 알려진 의성군의 끝자락에 가면 낙동강변에 박서생청년통신사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12월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온 박서생(朴瑞生)이 제출한 보고서는 조선의 수차제조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서 보고 온 수차는 수세(水勢)를 이용하여 자전(自轉)하는 것이었다.

농사를 하기 위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조선은 아래로 흐르는 물에 가설하면 돌지만  고여 있는 물에 가설하면 돌지 않아서 발로 밟아야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왜수차(倭水車)는 종래의 족답식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自激水車)라고 불리었고, 세종은 그 모형을 만들어 각 도에 보내어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박서생 통신사공원은 넓은 면적에 탁 트인 풍광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박서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의성을 대표하는 청백리였다고 한다.  

20세기까지의 역사는 어떻게든 간에 사람의 노동을 더 줄이고 더 많은 생산량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들여온 수차기술은 세종 이후에도 가뭄이 심할 때마다 수차를 권장하였으나 보급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토질이나 우량의 면에서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은 수전농업에 있어서 보(洑)나 제언(堤堰)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며 수차제작에 쓰일 적절한 목재가 별로 없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 

의성군의 박서생 통신사공원에는 벌써 가을이 찾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의 풍광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대로 가장 잘 보급된 것이 답차(踏車)라는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였다. 그렇게 들어왔던 수차는 조금씩 바뀌어 경북 의성의 아래지방에 가면 답차는 지금도 삼남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수차이며, 염전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지식과 의견교류는 양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통신사는 보통 조선통신사라고 하는데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적례(敵禮)적인 입장의 대등(對等)한 국가 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일 양국 간에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전기 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된 조선통신사선이 한 달간 1000km에 달하는 뱃길을 재현했는데 쓰시마와 이키를 거쳐 일본 본토인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왕복 1,000 km, 옛 조선통신사 여정을 마쳤다고 한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닌 기술도 당대에는 대단한 기술이었으며 지금 우리의 주력산업이기도 한 반도체가 100년쯤 지나면 전혀 다른 기술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신뢰로 소통한다’는 뜻의 ‘통신’(通信)이라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신뢰가 기반이 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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