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태원, 무안공항을 연상케 하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죽음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혹은 지구, 우주로 확대해 보면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인간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사람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살인과 강력범죄에는 법에서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라던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우리의 주변사람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한다. 사실 우리는 살고 죽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고 살아갈 뿐이다. 사실 왜 태어났는지도 알지 못한다. 왜 태어나면서부터 격차가 결정되고 삶의 질이 결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데스티네이션은 우리가 뉴스로 볼 수 있는 대형사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에서 살아남았지만 방해된 죽음으로 인해 결국에는 차례로 죽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는 친구 혹은 학교 등의 지인관계에서 일어났다며 이번에는 가족이다. 영화 속에서 이들 가족의 할머니는 남자친구와 우연하게 찾은 타워에서 사람들이 사고로 떼죽음을 당할 위기에서 구해내는 이야기에서 시작이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수백 명의 사람들은 결국에는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선하게 살던 악하게 살든 간에 죽음이 개의치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선과 악은 단순히 인간들이 정해놓은 개념에 불과하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은 원래 계획이 되어 있던 것일까. 세월호에서 누군가가 배가 흔들리면서 뒤짚힐 것을 미리 보았다면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숨을 못 쉬는 그 현장을 미리 보았다면 무안공항에서 비행기가 추락해서 구조물에 부딪치는 것을 미리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들을 모두 살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살았을까.
한국에서는 차례가 된 이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존재로 저승사자가 나온다. 한국적인 관점에서 보면 저승사자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해학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최근에 본 미션 임파서블이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을 보면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없다면 미래의 삶도 즐거울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존재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가장 좋을 때가 있다.
자신의 명대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도 100세가 넘는 사람들이 2,000명이 넘었다. 지금도 어디선가에서는 부주의로 혹은 자신의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계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살아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탄소, 철, 인등으로 구성된 사람의 몸은 해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혼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존재는 알 수는 없다.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이고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어 있으며 옳다고 믿는 것조차 어떤 때는 옳지 않은 것이 된다. 불완전하기에 나아가야 할 이유가 생기며 죽음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