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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에서 만난 송시열

영동의 월류봉을 바라보며 영동에 머물렀던 영동 송시열 유허비

조선의 역사에서 후궁이 다시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한 사건의 주인공은 장희빈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여러 번 그려진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중인 출신이었지만 집안은 상당히 여유로운 집안이었다. 그렇게 궁에 들어간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원자로 올렸지만 이때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우암 송시열이다. 노련과 남인의 양대 정치세력은 누가 먼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권력을 잡느냐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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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의 월류봉은 여러 번 방문해 본 곳이지만 이번에는 우암 송시열의 유허비를 보기 위해 반대편으로 걸어보았다. 숙종은 22세의 인현왕후가 후사를 볼 수 있음에도 후궁의 자식으로 왕위를 잇는 것이 부당하다는 노론계의 반대에도 총애하던 장희빈(이름 장옥정)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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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올라와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주도에 유배가 있던 중 숙종의 명을 받고 서울로 가다가 정읍현에 도착했을 때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그때 8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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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111에 영동 송시열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잠시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 3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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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은 한천팔경인 하나인 이곳 월류봉에 초당을 짓고 한 때 강항하였으며 후손과 유림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그 후 이곳에는 한천서원을 세워 우암을 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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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송시열 유허비는 정면과 옆면 각 1칸의 맞배지붕집의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긴 호흡으로 보면 장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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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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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황간면 월류봉 둘레길과 양산면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은 ‘영동 2대 둘레길’로 알려져 있다. 월류봉의 여덟 절경을 한천팔경이라 부른다. 이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머물렀던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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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년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이곳에서 10년을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쳤던 선생을 기리며 세운 비만 남아있지만 그가 걸어갔던 길에 대한 지향점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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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아래를 바라보니 물결이 흘러가는 것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일만큼 깨끗했다. 초강천에서 월류봉으로 치솟은 200m 암벽이 산양벽(山羊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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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듯한 절벽과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후손을 가르쳤던 우암 송시열은 매일 이런 호젓한 길을 걷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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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생을 살아갈 것처럼 살아가지만 순간을 살아간다. 순간에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순간의 불꽃을 보기도 한다. 우암 송시열의 삶은 불꽃처럼 왔다 갔지만 이렇게 월류봉은 남아 있다. 좋은 문장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그들의 삶을 바꾸듯이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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