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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07. 2024

이러고도 다음 달 성과 목표를 작성하는 내가 참...

해고 통보 일주일째

부모님께 어버이날 용돈을 드리고도, 그리고 전월 카드값을 다 선결제하고도 아직 통장에는 두세 달 치 여유 자금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원래도 뭘 펑펑 쓰거나 명을 구매하는 일은 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


나는 다음 달이 되면 구매해야지, 하고 지난달 하나하나 담아두었던 장바구니에서 아이들 간식과 밥, 모래만을 골라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는 어?!!! 나는?!이라고 외치는 듯한 나머지 물건들의 손 번쩍을 뒤로 하고, 마치 못 본 척, 막히는 출근길 휴대폰 화면을 내비게이션으로 빠르게 전환해 버렸다.




오늘은 다음 달 개별 성과 목표를 제출하는 날이다. 올해 1월부터 OKR을 작성하게 했는데 처음에 회사에서 제시한 게 이 용어가 아니라 이게 모여.... 싶어서 물어보고 다녔더니만 회사 영문명을 앞에다 붙이는 바람에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였다. 예를 들어 전 회사가 개발자가 임의로 admin 화면을 만들고 Henry's admin을 줄여 H admin이라고 부른 게 명칭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목표 및 핵심 결과지표(OKR)는 인텔에서 시작되어 구글을 거쳐 실리콘밸리 전체로 확대된 성과관리 기법으로, 조직적 차원에서 목표(objective)를 설정하고, 결과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목표 설정 프레임워크다.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 겸 CEO가 처음 고안한 개념이다.

인텔은 종전까지 1년의 성과관리 주기를 갖고 있던 타 기업의 방식에서 벗어나 3개월마다 성과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고, 이것이 성과 개선으로 이어졌다. 이후 벤처 투자자였던 존 도어가 인텔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글에 이 성과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구글은 이를 발전시켜 3-3-3 원칙을 개발했다. 3개월마다 팀과 개인 단위로 목표 3개와 핵심 결과 3개를 정하고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성과관리의 기간과 목표가 줄어들면서 성과가 향상됐다.

특히 구글은 각자의 OKR을 사내에 공개해 누구나 서로의 OKR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서로의 OKR에 피드백을 주어 건강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또 관리자가 주 단위나 월 단위로 OKR 진척 상황을 확인하도록 권함으로써 서로의 진척 상황을 나누고 계속해서 상기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OKR의 목표를 높게 잡되 목표 달성 여부가 인사고과나 성과급 등 직원 보상과는 분리되도록 해, 목표에 미달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아 직원들이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끔 했다.



1월 이후 매월 전사 목표, 부서별 목표를 잡은 다음 직원들과 세부 목표 설정은 물론, 그걸 실제로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다음 달에는 한 달을 회고하며 다음 달 목표를 잡는 건데,

실상 나는 번도 제대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 이후 내가 담당한 부서가 통으로 날아감으로써 그나마 어찌어찌 잡아가던 큰 방향성마저 잃었고, 크게 궤도를 벗어나게 된 내가 그 방향을 잡아주세요라고 OKR을 통해 도움을 청했더니 결국 그게 내 발등을 찍은 거였다.


우리 회사 목표는 다른 거 없다. 그냥 매출이다. 매출만이 수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데 영업팀을 제외하면 실제로 매출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부서가 몇이나 되겠는가. 애초에 저걸 하자는 의미가 회사가 나가는 큰 방향에 대해 어느 한 명 낙오자도 없이 같이 힘을 합치고 끌어주고 당겨주며 같이 달성해 나가자는 목적이 아니던가. 결국 정말 방향을 못 잡겠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쓴 직원에 대해 응? 너 왜 방향 못 잡아? 나가!라고 할 거면 대체 저걸 뭐 하려 하느냐는 거다.



1월에 우리 부서에 꽂힌 어마어마한 금액 매출 목표를 보고 어...? 하면서 어버어버 하다가 결국 면담하다 말고 운 일이 있었다. 정말 잘 달성하고 싶은데, 저걸 진짜 해내고 싶은데 감이 안 온다고. 도전적이고 동기부여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제 눈앞에 놓인 숫자는 그걸 모두 압살 해요..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났다. 너무 답답했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지금 다른 부서들도 다 그래... 다 달성 못할 거라고 생각해... 투자사들이 있잖니... 였다.


그런 대답을 기대한 건 진짜 아니었는데. 그게 아닌데.





나야 이걸 쓰든 안 쓰든 어쨌든 회사에서는 내보낼 궁리를 하고 있으니, 나도 어찌 보면 지금 이 목표는 시늉에 가까울 건데 다른 직원들은 이걸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할까, 아니면 그냥 에이 매달 그냥 하는 거- 하고 생각할까, 문득 궁금했다.


50여 명이 넘어가 60명이 다 되어가고 한 달에 두세 명씩 입사 중이다. 하지만 작년에는 없던, 입사 후 2~3일 만에 재퇴사를 하겠다 의사를 밝힌 사람도 한 달에 한 두 명이 생기는 중이다. 3개월 이내에 퇴사하는 사람이 처음엔 놀랍더니, 이젠 ㅇㅇ 하게 되는 분위기인 듯도 하다.




사실 이걸 계속 기록하고 있는 건 내가 나의 미움에, 나의 원망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말이라는 건 참 웃긴 거라서, 만들어진 즉시는 말랑 말랑해서 속에서 내뱉기가 쉬운데 이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딱딱해져 나중에는 가슴에서 아무리 꺼내려고 해도 쉽게 튀어나오질 못하기 때문이다.


다들 나에게 결국 시간싸움이라고 한다. 결국 누가 더 잘 버티고 있느냐의 차이인 거고, 결국 더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기는 게임이라고 한다. 모두들 나에게 조언을 더해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버텨라, 이다. 누군가 고통스러운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더 많이 기억하고 다음에 이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잘 대처하기 위해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거란다.


참 긴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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