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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08. 2024

귤 위에 피어난 작고 검은 곰팡이

해고 통보 여덟번째 날

전일자 제출한 OKR에 대해 상급자에게서 더 위의 상급자에게까지 제출하라 메일 회신이 왔다. 아침에 보자마자 군말없이 부서 내 최상급자에게도 파일을 보냈다. 덕분에 아침부터 최상급자의 끙- 끙- 하는 소리가 개인 사무실 천정 너머로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아마 이미 인사팀장이 내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거고(3개월 급여+실업급여) 그 3개월 급여를 주겠다는 최종 결정을 자신의 입과 손으로 내렸다간, 후에 대표에게서 니가 뭔데! 소리 들을까봐 끙끙대는 거다. 그 속을 누가 모를까.


저거 빨리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어. 근데 명분이 없어. 아니 있지만 이 놈이 노동청이라도 가면 머리 아파지는데. 저거 곱게 내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저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건 또 싫어.


누가 내 귀에 대고 랩하는 것 같은 기분이... 긁적 긁적.


어떻게든 내보내겠다고 결정한 게 지금 저 깊은 한숨의 주인공이라는 걸 내 모르지 않아, 그 고심에 나도 동참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 와중, 새로운 프로젝트 방에 신규 초대하는 건 뭔 생각인데?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마 지금 상태에서 가장 답답한 건 같은 부서내에 있는 S 차장일 테지.

한 달을 꼬박 기다려 신규 인원이 들어왔고 이제서야 혼자 낑낑대고 짊어지던 것들을 나눠서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앞이 캄캄할 정도로 일이 많을 거라 예상 된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거들 수 있는 건 거들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S 차장 입장에서는 선뜻 R&R을 나누긴 쉽지 않을 거다. 예상컨대, 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냥 통으로 툭- 떼어서 나에게 던져두면 내가 알아서 주물딱 주물딱 했을 터이니 그냥 큰 덩어리만 결정해서 던지면 될 거라 생각했을 텐데. 그걸 지금 못하고 있으니 속이 답답해 막힐 지경일 거다. 그 와중 이제 막 들어온 대리급과 사원급 하나를 가지고 한다? 사람이 힘들어 죽는 게 아니다. 막막하고 답답해 죽는 거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이미 두 차례나 거부당했다. 번복은 없는 거다. 나는 나대로 빨리 결론을 내주지 않아 이 화창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5월의 중간에 붙들려 출근해서 마음 계속 불편(끄응..)하게 앉아 있는 거고, 손인지 발인지 이게 뭐가 뭔지도 모르게 휩쓸려 이리 저리 쓸려다니는 애꿎은 동료는 손이 있되 빌릴 수가 없는 지경이다. 아예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미련이나 없지.


이 와중 내 위 상급자도 어제 사전 공유 없던 결근 끝에 오늘 퇴사 면담을 한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나 하나도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던 S 차장은 이제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듯 허허... 하고 있다. 합류한 지 이제 고작 몇 개월 안 된 S차장으로서는 어안이벙벙 할 수 밖에. 

하지만 떠나는 쪽도, 남겨진 쪽도 또 신규 합류한 쪽도 상처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사의 선택이 더해지고 더해져 이 지경까지 온 것이 나는 몹시 안타깝다.

마치 귤 위에 작게 피어난 곰팡이 한 점이 순식간에 전체를 뒤덮듯
순식간에 이 불안감은 각 부서에서 작게 피어나 전체를 덮어버릴 텐데




사실 나는 독하다. 더 버틸라면 버틸 수 있다. 나는 물컹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키워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자라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 싸워야 할지를 모르겠다. 늘 나의 고민인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다. 

지금 이렇게 작게 피어난 곰팡이가 퍼지고 퍼져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상대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멍들고 병들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정말 어디까지 버티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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