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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09. 2024

하, 사람은 너희가 잘못 봤어

해고 통보 아홉 번째 날

어제 세 번째 면담이 진행됐다. 날짜를 봐도 고작 보름도 안 되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나랑 자주 보는 거 싫지?"

"에이, 저 안 싫어요. 무슨 일로 마주치든 제가 이사님 좋아하잖아요."


로 시작하며 인사팀장님이 내건 조건은 이랬다.


다른 조건이야 다 동일하고, 5월 급여와 6월 급여까지 주겠다.

5월은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되고, 6월 급여를 일시불로 주든 아니면 6월 말까지 재직상태로 두든 그건 선택해라. 편한 대로 해주겠다. 이미 5월이 8일이나 지나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받는 한 달 급여에 해당될 수밖에 없는데도.


그래도 사실 나는 고민했다.

어지간하면 좋은 방향으로 끝내고 싶었다.

끝까지 가서 아이 개운해- 하고 move on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하면 여기, 이 자리에서 너무 서로에게 상처 내지 않고 봉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나는 후자에 속한다.


사람이 무르거나 싸울 줄 모르거나, 멘탈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냥 나에게 지난 시간 동안 참 고마웠던 인사팀장님이 회사와 나 사이에서 너무 긴 시간 난처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물론 그걸 조율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업무이긴 하지만, 그렇게 모질게 그건 니 할 일이잖아!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만족스럽진 않지만 선생님께서 그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으시다면 괜찮아요. 아예 왜 그랬어요! 할 정도 아니에요.라고 말해주는 노무사와의 통화 안에서 나는, 

울었다. 


너무 서로 아프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저 나중에 새로운 곳에 자리 잡고 나서 이 분께 인사하러 오고 싶단 말이에요. 잘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신 덕에 다음 회사도 잘 갔다고 그렇게 인사하러 오고 싶단 말이에요.

라며 거리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연신 옷깃으로 흐르는 눈물을 문질러 닦아가며 들어줄 이유가 없는 노무사를 붙들고는 하소연하듯, 알아달라는 듯 울었다.




그 뒤로 한 명의 노무사와 더 통화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의지하고 상의하는 전 회사 C 레벨, 심지어는 한 잔  하시고 귀가하시는 아버지께도 인생 선배로, 직장 선배로서의 견해를 물었다. 지금 내가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게 적정선인지. 바보 같은 건 아닌지. 너무 물러 빠진 건지.

심지어는 X-남친하고도 이 이야기를 길게도 했건만, 나보다 열다섯이나 어린 그 사람으로서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을 거다. 이 말 외에는. 


너무 아프지 마셔라. 가장 마음 편한 것으로 선택하셔라. 

실은 그 말이 정답일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누워서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인가.

아니었다. 도무지 스스로 납득이 되질 않았다. 처음 내가 제시한 건 근무일자까지의 급여, 그리고 이후 3개월에 대한 급여 보상이었는데, 그걸 두 달로 자르고도 또 근무한 달까지 포함시키는 건 너무 후려쳐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완벽하진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모욕적인 퇴사를 강요받을 만큼 그렇게 근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모두 각자의 사정이란 것이 있으니 고집만 피울 게 아니라 회사에서 이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보상을 제시해 주길 바랐다.


결국 나는 새벽 끄트머리에서 협상안을 정리했다. 이번달 말까지 근무, 퇴사 + 이후 2개월치 급여 보상.

최종적으로 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고 나에게 설득해 봄직한 정도의 기준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내 위 신규 배정된 상급자를 만났다. 전일에 그만둔다고 했던 상급자였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하시길래, 아휴 아니에요. 어제 엄청 고민했는데요.라고 대답하니 부장님도 달치 받고 그냥 그만두래? 이러신다. 헉.... 싶었다.


순간, 이 회사는 내게만 유독 무례한 게 아니구나, 나 말고도 몇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무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지난 시간 동안 봐왔던 게 있긴 했지만.


그 와중 정말 펑- 하고 터지는 일은 출근한 뒤 30분이 지나서야 발생했다. 

전날 밤 10시 반과 새벽 6시 20분에 터진 CS 후처리를 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다른 부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과장이 와서 묻는다. 부장님 또 어디로 옮기세요? 맨날 그렇게 옮겨 다니셔서 어떻게 해요... 부장님 자리에 다른 부서가 와서 앉는다고 하더라고요.


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잠시 눈을 굴렸다. 그 순간 과장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아꼈다. 아직 나 협상 안 끝났는데? 오늘까지만 나온다고 말 안 했는데, 내 자리로 누가 온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 과장에게 가서 앞뒤를 물었다. 그랬더니 전날 다른 부서와 인사팀장이 와서 내 자리를 보고 여기 앉으면 되겠네, 상의하고 갔단다. 그래서 물은 거란다. 순간 머리가 띵, 했다.


어제 낮 시간에 와서 자리를 보고 갔다는 건 나와 저녁 면담을 하기 전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를 귀띔도 안 했다고? 나는 나대로 만족스럽지 못한 협상안임에도 불구, 인사팀장이라 그나마 어떻게든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그렇게 밤새 뒤척거리면서 고민했는데 뒤로는 내가 아직 빼겠다 말하지도 않은 자리에 와서 앉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 





그리고 아침 10시가 되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협상 못 받아들이겠다 말했다.

알겠다고 하고는 끝이 났다. 자리 어디로 옮기냐 물었더니 이따가 공지 보란다. 밤새 서로 조금 덜 다치고 잘 봉합되길 바랐던 내가 세상 병신, 세상 바보 같단 생각이 들어 입을 닫았다.


점심시간에 전 회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HR 담당자와 잠시 통화하기로 했다. 나보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세상 지헤로운 어른 중 하나이니 어떻게 하는 게 가장 베스트일지를 물어보기 위해 시간을 양해해 부탁했다. 


사실 근데 내가 물으려던 건, 근무한 당월 급여 + 2개월치 급여 정도면 어느 정도 인사팀에서도 받아들일 법한 수준인지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아우, 나랑 통화한 노무사님들 노발대발하긋네... 아니라고...!!라고 하시겠지) 의견을 묻고 싶었던 건데, 뭐 그게 너무 우스운 질문이 되어버렸다.


도깨비의 대사 중 여주인공 어머니 사망보상금을 빼앗으려 드는 이모와 공유 쪽 변호사의 대화 중 이모가 사람 잘못 봤어~ 내가 어두운 쪽 사람들을 많이 알아~ 하는 말에 대답한 게 있다.


사람은, 아줌마가 잘못 봤어.


그렇다. 사람은 회사가 잘못 봤다. 이렇게 된 이상, 굳이 회사에 대해 감안해 줄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내가 어지간히 하고 물러날 생각을 한 건 회사가 이뻐서도 아니고 내가 혹시? 잘못했나? 의구심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내가 존경했던 인사팀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는데, 인사팀장님 조차 나에게 입장을 내세워 일을 하시겠다 한다면, 나도 내 입장을 굳이 굽힐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생각보다 일찍 이 해고 일기가 마무리되겠구나 여겼던 과정에 아주 긴장감이 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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