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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심장 May 10. 2024

해고 이유 = 중간관리자≠재택근무, 평일휴무

해고 통보 열 번째 날

전날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최고 상급자와의 면담은 1시간을 꼬박 채웠다. 녹취는 길고 무거워 일단 핸드폰에만 저장해 뒀다. (날아갈까 봐 그전 녹취자료들은 다 클라우드 올려뒀다) 무겁고 기다란 녹취만큼이나 나는 진이 쏙 다 빠져서 들어왔다. 


아마 인사팀에서 처리가 안 되니 내가 한 번 이야기해 보겠다는 심산으로 시작한 최고 상급자와의 면담. 왜 내가 계속 같이 일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들어갔다. 그런데 잘 들어보니 결국 근무 성과나 정말 정량적으로 그러니까, 회사에서 만나서 같이 일을 한다는 가장 베이스의 기준에서 내린 평가라기 보단,


재택근무가 좀 그래. 주말에 중간관리자면 일할 수도 있지. 그렇다고 평일에 쉬는 건 좀 그래.이다. 

즉, 그의 눈에 내가 띄지 않아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게 결국 같이 일하기 힘든 이유였다는 평가. 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손가락이 대답을 찾지 못해 엄청 꼬물꼬물거리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 나는 잽싸게 아래로 빼 허벅지 밑으로 쑤셔 넣었다.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다. 재택근무가 내 입사 조건이었다고. 평일 휴무는 주말 이틀을 몽땅 다 갈아 넣은 것에 대한 인사팀과의 협의였다고. 내가 나 이렇게 할게요!라고 통보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고객 대응에 가장 효율적 일지를 찾는 과정에서 아무도 주말을 갈아대고 싶어 하지 않아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거라고. 나도... 나도...!!! 주말에 놀러 가고 싶고 남들 쉴 때 쉬고 싶고 그냥 그 범주 안에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게 이제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그저 암요, 암요 하면서 생글생글 분위기를 맞췄다. 지금 와서 서로 니가 맞네, 내가 맞네 날 세워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얼굴에는 미소, 적당한 추임새. 감정이란 감정이 모두 쏠려 들어간 듯한 손가락 끝은 눈에 띄지 않게 허벅지로 꾸욱... 눌러뒀다. 이런 자리에선 감정을 드러내는 쪽이 지는 거니까.




사실 얌전하게 군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럼 다시 근무할래? 요즘 태도 같아서는 좋은데.라는 제안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 한 달짜리 위로금을 더 주고 싶지 않아서 다시 근무해 볼래라는 소리를 한다고? 아마, 다시 한번 내가 다시 해보겠단 소리가 또 안 올라간 건가? 머릿속이 팽팽 돌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니만..


아, 안돼...


정말이지 다시 출근하는 일은 그 무엇을 통틀어서라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 나도 인간이다...! 

그리고 뭐 이래저래 길고 긴 이야기들이 쭉- 이어졌다. 그냥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들. 일단 무엇보다도 정말 실망감과 상실감이 온 건, 고작 절대로 다시 근무를 할 수 없다는 답변과 요즘 보니 괜찮아졌네, 다시 일할래? 간격이 고작 휴무일 빼고 4~5일 정도였다는 거다. 그러니 일주일. 일주일 동안 나에 대한 평가는 절대 회사에 둘 수 없는 존재에서부터 다시 성실히 일할 것 같은 존재로 180도 탈바꿈되었다. 

사실 그 사이에 바뀐 건 딱 하나, 주말 근무를 없앤 것 뿐이었다. 

계속 회의록으로만 F/ up 하는 게 너무 벅찼던 나는 한 달 만에 포기하고 평일 출근하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했고 그게 받아들여진 것 뿐이었다. 


그게 나는 참, 서러웠다. 이제 입사한 지 한 두 달 된 회사도 아니고 이제 인턴을 단 것도 아닌데, 3년 차 부장 직급이 고작 4~5일 동안 180도 바뀐 평가, 그것도 업무 성과 같은 것이 아닌 고작 맘에 든다, 안 든다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이...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식되었다.




나는 노무사가 가르쳐준 대로 차분히 녹취를 마쳤고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로 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제안을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도 했다. 일단 그 정도 정신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일찍 찾아가 5월 말까지 근무로 종료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5월 퇴사(실근무는 오늘까지) + 일정 보상금 + 연차수당 + 퇴직금 그리고 실업급여면 뭐, 100% 만족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괜찮다라고도 생각했다. 그래... 뭐 그렇게까지 버티냐.... 날 그만 세우자.... 라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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