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통보 스무 번째 날
몇 년 전엔가... 산보다는 바다성애자에 가까운 나는 보통 산에 갈 일이 잘 없는데, 그놈의 내기가 뭔지... 내가 북한산 정상에 오르나 안 오르나를 가지고 50만 원 내기가 걸리는 바람에, 어느 날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선 적이 있었다.
바보 같게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사랑 산악회' 출신인 걸 깜빡하고(아유, 이 코스로는 코 앞이야, 코 앞! 금방 간다~) 아무 생각 없이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끌고 올라갔다가.... ㄷㄷㄷㄷ....
그렇게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기어서 여하튼 낑낑대고 올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온 평지. 끝인가...? 했더니 아니란다, 저~기 보임? 저 대머리같이 민둥민둥한 데? 거기가 정상이여! 코 앞이네!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털썩... ㅠ 그런 내 앞에 펼쳐져 있던 것이 북한산 산장이었다.
안에 들어갔더니 평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은 좀 많다 정도였지, 와글바글 정도는 아니었던 기억. 거기서 대략 20분을 더 올라간 다음에야 정상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스니커즈를 신는 바람에 주룩주룩 미끄러져 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올라갔지만.
금요일에 거의 마지막이다시피 한 면담을 끝냈다. 하고 싶은 말도, 준비한 말도 꽤 많았지만 어쩌기로 했어요?라는 질문에 정상 근무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뭐 사실 사측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거다. 연차 소진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5월 말에 퇴사하겠다는 합의서도 쓴 마당에 고작 2주를 대기발령 내기도 힘들 거고.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나오지 마라 하기엔 휴업수당이 또 따로 나가는 거니...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었겠지.
결국 꽤 착실하게 준비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싱겁게 끝이 났고 그걸로 끝이었다. 덕분에 나는 나머지 2주간 내가 뽑아놓고 결국 홀로 남아버릴 후임에게 짧게나마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피그마로 매뉴얼을 만드는 상황에서도 결국 내가 만들어주고 나면 그 후임이 굳이 새로운 툴을 배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
나의 마음과 다르게 할 건 하는 게 맞다.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나의 몫은 끝까지 최선을 다 해 마무리 짓는 것이 옳다.
그래서 앞으로 2주간은, 실상 더 이상의 논쟁이나 싸움은 없을 예정이다. 정말로 완벽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다음에야, 나는 5월 31일 금요일 오후에 업무를 정리할 거고 기기를 초기화한 뒤 반납할 거고 인수인계서와 기기 반납 서류를 작성할 거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모두가 건강히 잘 있기를, 나를 내보내는 회사가 부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수익 모델을 기어코 찾아내 크게 성장하기를 기원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아직 퇴사라는 정상에 오르진 않았지만, 어쩐지 여기까지 오면 다 왔구나- 하고 마음을 조금 놓게 되는 퇴사 산장에 도착해 있다. 이 산장에는 오직 나 밖에 없는 듯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서글프거나 서럽거나 억울하진 않다. 그저 평온하고 고요할 뿐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겪는 해고나 강제 퇴사 과정을 같이 겪은 사람 중 몇 안 되는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일정 금액의 보상금, 퇴직금, 연차수당 그리고 실업급여까지.
이 정도면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짧고 굵게,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낸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한 두 달 뒤 자발적으로 그만두려고 고민하던 회사였으니 미련도 없다. 회사가 어땠다 저쨌다라기 보단, 내가 이 회사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다 마무리가 된 것도 맞고 사업의 시작에서 끝까지, 한 사이클을 지켜봤으니 그도 내 마음에 충분하다.
이제 이 산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잠시 재정비를 한 다음 정상까지 오르기만 하면 된다. 여기까지 왔으니 잘 마무리하면 된다. 그게 이제 내게 남은 일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