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여행자'의 동네 소개
3월 1주 보글보글 글 놀이
우리 동네를 소개합니다
우리 동네를 소개하기 앞서 저를 잠시 소개할게요. 저는 관광경영학을 전공하고 국내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입사해 15년 근속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친정집 들르듯이 돌아다녔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 곳곳의 체류지의 관광정보를 거짓말 좀 많이 보태서 우리 동네 소개하듯 읊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살짝 허풍을 떨어봅니다. 제가 이제부터 하는 동네 소개, 기대되시나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런 저도 잘 소개할 수 없는 정보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의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곳저곳을 짧게 훑는 여행자로서는 알기 힘든 그곳에 진짜 살고 있는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조금 전 관광정보와 맛집 정보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것도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돌아서면 바뀌어있는 것이 관광 정보들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만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로 관광/ 여행업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물론 이제 위드 코로나로 천천히 회복이 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그동안 우리가 머물렀던 집 그리고 우리 동네에 대한 생각이 획기적으로 바뀐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리 모두 이제 집과 여행에 대한 생각들을 새롭게 가지게 될 만큼 힘든 시기를 겪었으니까요.
세계를 아무리 걸어 다녀보아도 결국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는 곳은 내가 지금 오래 머무는 곳, 살고 있는 이곳의 이야기 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제가 소개할 우리 동네 이야기는 우리 동네의 실제 겉 정보가 아니라 속정보, 아주 주관적 정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저는 세계의 구름 위를 달리던 여자의 걸음이 아닌, 아이와 아주 느리게 집 주변을 걷는 엄마의 걸음으로 우리 동네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전부터 우리가 어딘가를 소개한다면 관광정보와 더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같이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환경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동네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특별한 환경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동네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해 조금씩 개성 있는 동네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동네에 도착해서 그저 유명하다는 관광지만 훑고 간다면 그곳의 반쪽만 보고 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우리 동네를 '연대감과 친밀감으로 상호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가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느슨한 공동체는 건강에도 아주 좋습니다.
장수마을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전 세계가 모여들어 조사를 했었지요? 오키나와의 장수촌에서 무엇이 그 비결이었을까요? 식탁에 자주 올랐던 해초 덕분일까요? 아니라면 생선? 모두들 그 식단에 궁금증이 많았었지만 연구 결과 장수마을을 만든 것은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그들의 공동체 의식, 유대감이었다고 합니다. 식탁 위에 올려둔 음식이 아니라 그 옆에 앉은 가족이나 이웃-바로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화 속 외로웠던 클라라도 알프스의 공기가 좋아서 걷게 된 것도 있겠지만 하이디가 함께여서 건강해진 것이겠지요.
고독사에 방치된 채 시신이 한참 후에 발견된 분들의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이미 영국에서는 '외로움 담당 장관'이 임명될 정도로 요즘 현대인들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상황으로 더욱 심해졌지요. 아파트의 문을 닫고 서로 옆집 얼굴을 모른 채 지내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동네의 낮은 담장과 열려있는 울타리를 볼 때마다 어쩔 때는 저도 신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주택단지는 오래전에 신도시 1기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집의 스타일이 올드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서양식 목조주택 형식의 집들이 많아 요즘 새로 만들어진 주택단지와 다른 특유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낮은 담장 너머 아담한 마당이 있으며 제각각 다른 건축방식으로 지어져 있어 보는 재미가 큽니다. 저는 30년 된 집을 고쳐 살고 있는데 다른 집에 비해 집의 평수는 적어도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마당이 넓은 집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주변에 새로 짓는 집들은 사적 공간을 위해 벽을 높이고 중정 마당을 만들거나 해서 외부에 오픈된 마당이 잘 보이지 않는 집을 많이 짓고 있어요. 단단해 보이고 열 손실은 적을 것 같지만 오래 전의 건축양식이 남아있는 클래식한 느낌의 우리 동네의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마당을 공유하는 동네, 마당의 꽃을 이웃이 더 잘 볼 수 있게 배치하는 동네, 거름 주고 정성껏 기른 나무에서 자라는 과일이 익어가기를 함께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 함께 나누어 먹는 수확의 기쁨, 도심 속 주택단지지만 정발산이 있어 전원마을의 정취를 누릴 수 있고 도서관, 종합병원, 백화점, 마트 등 도심의 편의시설이 가까이하고 있어 살기 좋은 우리 동네입니다.
-보리네
이웃에 사는 '보리'는 재작년 덩치는 컸지만 아기 골든 레트리버였습니다. 딸은 보리를 너무 좋아해서 보리네를 지나갈 때마다 불러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보리는 멀리서도 빈이를 알아보고 달려오기도 하고 보리 이모가 잠시 못 본 새 우리 집 마당으로 달려들어올 때도 많았습니다. 대형견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보리의 성장을 보면서 마치 우리의 보리가 자라는 듯 뿌듯했습니다. 우리 마당을 좋아하는 보리와 함께 올봄에도 많이 놀 예정이에요. 보리네 마당에 놀러 가면 늘 얻어오는 꽃모종, 여름에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포도송이를 보는 것과 더불어 맛난 살구 열매 따기는 아이들이 늘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연0 언니네
처음 만났을 때 4학년이었던 연0 언니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어요. 언니랑 함께 등교하자고 했었는데 2년 동안 딸아이 등교일과 다른 요일에 등교하게 되어 결국 함께 등교를 못하고 언니가 졸업을 하게 돼버렸네요. 아이들과 골목에서 롱보드나 인라인을 같이 타고 놀이터에서 함께 신나게 놀아주는 든든한 언니입니다. 언니네 마당에서 캠핑 온 것처럼 시원하게 발 담그고 놀기도 하고 작은 꽃밭의 꽃 이름을 이야기하다 보면 연0 엄마, 보리 이모네도 밖으로 나오셔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 멀리 노을이 까맣게 넘어갈 때까지 지나가는 이웃들과 골목길 대화를 나누다 돌아가요
-이사 간 옆집 할머니네
할머니 집에 놀러 온 어린 손자를 위해 풀장을 가동하고 마당 캠핑을 즐기는 마당 넓은 옆집은 얼마 전 이사를 갔습니다. 전세로 잠시 살려했다가 이 동네가 너무 좋아서 떠날 수가 없었다는 할머니는 결국 마음에 드는 근처의 다른 집에 다시 전세로 또 지내며 진짜 마음에 드는 집을 찾고 있다고 해요. 이사 가셔서 아쉬웠지만 할머니네 따님이 이 동네의 길냥이 밥을 챙겨주러 매일 산책을 오고 있습니다. 차 밑에 숨은 고양이 친구들을 찾느라 예쁜 긴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 채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해요. 옆집은 곧 허물어지고 새로운 집을 지을 예정이라는 데 옆집 데크에서 잘 놀던 길냥이들은 이제 완전히 우리 집에 정착할 듯합니다.
-책 산타 앞 옆집
언제나 부지런하게 나무를 깎으시고 손수 벽에 페인트칠도 하시며 관리가 완벽하신 앞 옆집은 매너 좋으시고 세련된 부부가 살고 계세요. 그동안 출판사에서 일하셔서 애들 보라고 쇼핑백 가득 홍보용 신간 어린이 책들을 주시던 아저씨 덕분에 아이들은 책 선물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새집 된 앞집
그 옆집은 이 마을 처음 생길 때부터 사셨던 부부인데 따님의 결혼을 앞두고 내부 인테리어를 싹 하면서 새집으로 거듭났습니다. 인테리어가 끝나면 꼭 집을 보고 싶다고 졸랐던 제 말을 기억하시고는 이사 전날 집 투어를 시켜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중정에 스킵 플로어로 미로같이 신기했던 구조의 세련된 집으로 바뀐 새집에 감탄했어요. 그러다 2층 창밖으로 바로 내다보이는 반대편 우리 집을 바라보니 뭔가 새롭고 신기해 보였습니다. 내부만 고쳐 살고 있다 보니 오래돼 보이는 우리 집이지만 놀기 좋게 비어있는 썰렁한 마당이 더없이 소박하고 저에게 딱 좋아 보였습니다.
-프랑스 요리와 비밀의 화원
이웃 중에 방송에 소개될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집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집을 지나치다가 마당을 밖에서 구경하던 저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선뜻 말씀하셨던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다정한 환대에 비밀의 궁전에 들어간 듯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프랑스 요리 선생님이신 이웃이 제 지인의 지인이라는 것을 알고 더 반가웠지요. 마당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몰랐던 이사 온 첫해 가을, 황량한 저의 마당에 서있던 저를 부르시더니 심다가 남았다고 하시며(그럴 리가 없지만) 아름다운 튤립 구근들을 선물해 주셨어요. 그렇게 우리 집에서 처음 맞이하던 봄, 저는 이웃을 통해 여태 본 적 없던 아름다운 튤립들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선물 받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동네 여행자 이야기
우리 동네를 소개하지만 '동네'라는 것은 아주 작고도 큰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걸어 다니는 동네와 차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니는 동네처럼 사람마다 느껴지는 동네 범위도 다를 테니까요.
저는 여러 가지의 상황별 삶 속에서 극과 극의 여행 체험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수십 개국을 여행하던 승무원이
육아를 위해 집에 머물러 살았고
수천 명을 서비스하던 승무원이
딱 두 아이만을 키우는데도 애를 쓰며 살고 있지요.
그 짧고도 긴 육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의 동네, 내가 아이와 함께 걸어 다녔던 작은 동네가 이제는 각지에서 데이트 코스로 모여드는 핫플 '밤리단 길'이 되었습니다.
사계절 꽃이 피는 우리 동네 개성 있는 집들의 마당은 영국식 정원 못지않은 절경의 순간을 매년 뽐내고 있고요. 비록 제 마당이 황량하더라도 우리 동네에 살면 매일 아름다움을 지나치지 않고 향기에 취해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 돌집에 머물던 한 달 살이에서 느꼈던 점이 있었습니다. 꼭 제주가 아니어도 되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우리 집에서도 매일 여행 떠나듯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늘 다니는 동네, 같은 거리를 보지만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일이 코로나 시대, 삶 속 매일 떠나는 또 다른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곳에서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발견하는 것은 '깨어있으라'라는 뜻입니다.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겉이 아니라 진정으로 알아보며 살아가는 것은 수행자. 수도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일상에서도 마음 수련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딘가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소비하고 얻는 것에서 만족을 느꼈던 승무원으로서의 저의 젊은 시절.
오대양 육 대륙을 누비면서 접한 수많은 음식과 관광지, 산과 바다와 사람들을 거친 후 이제는 동네에 머무르면서 느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세계의 좋은 곳을 그저 계속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삶에 큰 의미를 주지 못한 다는 것을 우리 동네를 천천히 걷는 동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현재 존재하여 발 디디고 있는 이 땅의 지리적인 위치에 한계를 느끼지 않고 언제나 지구 반대편을 날아다닐 수 있었던 그때와 지금은 차이가 크지만, 이제는 제 발로 천천히 걷는 내 집 근처 정발산공원이 뉴욕 한복판의 센트럴 파크보다 더 좋은 이유를 열 가지 넘게 더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든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멋진 공간을 찾는 것
그것이 삶을 여행할 줄 아는
진정한 '이 순간 여행자'의 삶일 것입니다.
그런 일상 여행자로 살고 싶습니다.
- 새로운 공동체의 설레는 연결감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할 수 없이 그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들여야 했던 긴 시간-좌석벨트에 묶여 조각났던 긴 이동시간을 없애니 내적으로 더 충만하고 질 높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남는 시간에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동네 책방을 갑니다. 슬슬 걷다가 큰길을 건너면 우리 동네 책방 <너의 작업실>이 나옵니다. 글 친구들과 함께 온라인에서 글을 쓰고 브런치에서 글 친구로도 만납니다. 동네 책방 주인은 사람 복이 있어서 그 근처에 <홀씨의 작업실>도 이제 막 열었습니다. 주변 이웃들과 다양한 클래스를 열어 소통하고 이웃공동체와 글방 공동체가 만나 함께 사회적 유대감을 느슨하게 가져갑니다. 느슨하지만 깊고 끈끈하게 이어가려는 젊은 움직임이 우리 동네를 앞으로 어디로 데려갈까 제 가슴도 함께 뛰고 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 이제야 발견한 동네 책방과 글방 공동체를 마지막으로 소개했으니 긴 글 이만 마칠까 합니다. 전 세계 어디를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던 제가 있을 곳, 제가 가장 행복한 곳을 저는 찾아내었고 그곳은 모두 우리 동네에 이미 다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동네 책방에서 추억을 쌓으며 걷는 우리 동네입니다. 매일매일 발견하고 살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연결되어 아마 장수마을보다 더 오래 사는 마을로 기록을 깨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이웃 공동체는 건강과 장수의 숨은 요인입니다.
모두가 각자 사는 곳인 우리 동네를 사랑하기로 해요. 이 동네 사람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속 마을이 현실이 될 거예요.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멋진 공간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삶을 여행처럼 사는 이가
매일 내 발걸음으로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 글, 송유정 작가님의<용인이 좋아용>
로운 작가님의 <일산,운정 ‘집밥으로 손색없는 맛집’을 소개합니다>
서무아 작가님의 <가재울 아파트 사용설명서> 입니다.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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