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나 분노가 아닌, 슬픔
회사원에게 점심 메뉴 선정은 경력 관리나 투자 계획 이상으로 심각한 실존적 문제일 것이다. 전국의 모든 회사원들은 하루에 한 번씩, 이 남의 돈으로 사먹는 점심 메뉴를 공들여 선정한다. 나는 최근 들어 돈까스에 꽂혔다. 요새 유행하는 두꺼운 고기 혹은 사이에 치즈가 들어간 경양식 스타일의 돈카츠가 아니다. 좋게 말하자면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거칠게 말하자면 대학 학식 스타일인 돈까스이다. 얄팍한 고기를 튀겨서 신맛이 가미된 양념을 뿌리고, 양배추 샐러드와 밥 조금이 함께 나오는 그런 돈까스.
물론 메뉴 선정이란 보통 같이 밥 먹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장파워가 강한 사람의 특권이기에 항상 내가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요일에는 흔치 않게 기회가 찾아와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최근 이사한 사무실은 일견 보기에는 비싼 밥집들 투성이인 것 같았지만, 근처 골목을 지나다니다 보면 합리적 가격의 음식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 중에 한 곳이, 온갖 홍보물로 창문을 도배해서 안쪽이 안 보일 정도인 곳이 있었다. 돈까스 파는 곳이었다. 그곳을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가끔 누구나 살다 보면 아 더이상은 되돌아 갈 수 없다,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은 음식점에서도 있다. 들어가고 나서 아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도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을 듯한 좁은 공간,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에 둘이 앉고 나면 너무 늦었다.
돈까스 집 안은 빛이 부족해 실내는 약간 어두컴컴한 느낌이다. 돈까스가 있고, 치즈 돈까스가 있고, 두툼 돈까스가 있다. 음식점에 가면 가장 비싼 음식과 가장 저렴한 음식으로 그 음식점의 수준을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하지만 일단 중간 가격의 두툼 돈까스 하나, 높은 가격의 치즈 돈까스를 시켜본다.
벽은 여태까지 방문자들의 낙서로 가득하다. 브랜드 대회 같은 것에서 받은 상장이나 신문 기사도 걸려 있다. 이런저런 것들은 제쳐두고 음식점 한쪽의 셀프 코너를 본다. 양배추 채 썬 것, 양파 채 썬 것, 국, 밥, 소스, 식기류가 있다. 밥과 국을 열어 본다. 보온 밥통이 보온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하지만 밥통 뚜껑의 말라붙은 양념 흔적을 보니 굳이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밥을 조금 덜고 돈까스 기름기를 더는데 좋을 것 같아 양파를 집어 보려 하는데 양파가 약간 거뭇하다. 집게를 다시 내려놓는다. 식기류를 챙기기 위해 젓가락과 포크 등을 챙긴다. 정리가 잘 안 되는 튀김집에서 흔히 생기는 약간 찐득한 느낌의 감촉이 손에 닿는 듯 하다.
치즈 돈까스와 두툼 돈까쓰가 나온다. 접시 위에 돈까스만 나온다. 셀프 코너에서 밥과 야채 소스를 직접 취향대로 덜어 먹는 것이 사장님의 빅 픽쳐였던 것 같지만, 맨 처음에는 준비해서 주는 것이 낫지 않았으려나 싶다. 치즈 돈까스의 치즈는 좋은 품질인 듯 하지만, 견과류와 다진 고기를 치즈와 함께 뭉쳐 튀겨낸 형태인 것 같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히 부셔진다. 두툼 돈까스는 작게 썰어져서 나온다. 고기가 두꺼운데 썰어서 나오니 안 그래도 뻑뻑한 돈까스용 고기가 더 빠르게 뻑뻑해진다. 팍팍한 식감 개선을 위해 소스에 찍어서 먹어 본다. 묘하게 한약 맛이 난다. 건강을 중시하시는 모양이다.
말없이 음식을 다 먹고 나온다. 점심을 먹었는데 먹은 것 같지 않고, 최근 들어 가장 큰 사고를 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든다. 이 음식점은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식후의 열띤 토론을 나눠본다. 이 음식점이 원래 이렇지는 않았을텐데,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지만, 어쨌든 둘 다 동의하는 것은 있다. 순위에 넣기조차도 애매한 이상한 음식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신 가고 싶지 않은 음식점에서 밥을 먹었는데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음식점에 가서 이상한 음식을 먹거나 이상한 대우를 받으면 처음엔 짜증이 나고, 그 정도가 심하면 분노를 느낀다. 엉망진창인 음식이 혼돈의 환경에서 나오면 보통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40분 정도의 경험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내 마음은 그냥 잔잔한 호수마냥,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처럼 음 고기가 뻑뻑하군 하면서 돈까스를 씹어 삼켰을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슬픔을 느꼈다. 비록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견과류가 들어간 치즈돈까스를 만들면서 사장님도 개발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었을 텐데.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더 나은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던 돈까스 내 오는 방식도, 나름의 판단 아래 내린 결론일텐데. 지금 이 가게의 모습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 사장님의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장님의 최선이 나에게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밥을 먹던 탁자 옆에 사회복지사 책이 있었다. 손님 입장에서 업주가 흔들리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책이 거기 있다는 것이 지금 이 가게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슬펐다.
물론 내가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사 줄 생각은 없다. 불쌍하거나 애처롭다는 이유로 돈을 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단순히 짜증이나 분노를 넘어서서 모든 것이 엉망 진창이 되었을 때 거기서 느낀 슬픔이나 애처로움으로 그날 오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발 한번 삐끗하면 뼈까지 씹어먹을 들개들이 가득한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어떻게 장사를 하실 생각인지 궁금한 사장님과 그 가게를 구경한 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