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이 희망이었던 이유
옛날 대학교 시절에, 게임을 자주 하던 때가 있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하기 힘든, 다른 사람을 승리로 찍어누른다는 쾌감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호승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나 또한 그랬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 가며 게임에서 진다 해도 배우는 것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명확한 것이었다. 게임은 이겨야 재밌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게임을 하다가, 내가 그날은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기고 싶었다. 물론 게임은 나를 포함한 5명이 한 팀이 되어 상대 팀과 하는 것이고, 단순히 내가 열심히 한다고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기고 싶었다. 상대를 이기는 승리의 쾌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한판만 더 할 생각으로 게임을 계속했다. 이기면 자야겠다, 는 생각으로.
내가 그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기는 일은 없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로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다음판은 어쩌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내가 열심히 하는 것과는 비교적 상관이 없는 일이고 오히려 운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음판은 열심히 하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닌, 어떤 수를 써도 이기는 것은 결국 동전던지기에 불과하다는 절망에 직면하는 것이다.
게임이 사실 인간사회의 일면을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비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꽤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게임을 하지만, 사실 이길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현실이.
사람들은 각각 다른 목표를 꿈꾼다. 열심히 해서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을 사는 것,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는 것, 꿈에 그리던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남은 일생을 함께 살도록 약속하는 것. 그것을 자신이 열심히 하면 가능하다고, 희망을 가진 상태로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은 희망이 아니며, 자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정해져 있음이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라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기다린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집을 물려줄 수 없다면 집을 가질 수 없고, 금전적 지원을 해줄 수 없다면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다. 돈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그 어떤 것도 원한다고 가질 수 없어,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쥐어줘야만 하는 것이다.
희망은 이런 상황에서 절대 할 수 없는것을 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런 희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종래 자신이 원하는 것이란 얻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내뱉어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라는 절망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끝이 보이지 않는 희망에 매달리기를 선택한다. 그래도 이것보단 나아지겠어 하는 희망으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절망을 덧칠하면서.
결국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절망은, 희망이라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온다. 그리고 단순히 가질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어 모든 것을 탕진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내리는 재액이 가득한 상자에 희망이 함께 들어 있었던 이유이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했던,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희망이 악 중의 최악이라고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