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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훈주 Oct 11. 2024

1. 꽃의 뿌리를 먹고 싶어

가현은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꽃의 뿌리를 먹고 싶어"


가현은 가끔 뜬금없는 말을 하곤 했다.


 최근엔 몇 주간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큰 맘먹고 놀이공원에 데려다 주니 입구 앞에 파는 공룡 풍선을 사곤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집 가자.”

그리 놀랍지도 않다. 가현은 계속 관심사가 바뀌었고, 또 며칠 가지 않아 쉽게 사그라들었다.

“그거 팔각 성냥 같은 거야. 좋은 성냥개비는 조금 더 오래 탈 순 있겠지. 그래도 결국 성냥이니까. 가현이 걔도 그래. 성냥통에 남들보다 성냥이 많을 뿐이야. 그래서 신나게 성냥불 켜는 거고.”

민수 형은 담배 불 붙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럼 성냥을 다 쓰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물으려다 너무 말꼬리 잡나 싶어 그만뒀다.


“한 번은 잡지에서 하얀 사진을 본 적 있다? 알비노 병을 앓는 소녀 모델이었어. 모델은 꽃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뭔가 슬프더라. 뭔가 아름다운데 슬펐어. 그래서 그 사진만 찢어서 방에다 붙여뒀지.”

“너 근데 잡지 보는 취미도 있었어?”

“아니. 그냥 도서관에서 빌렸었는데?

언제나 기대 이상이다. 빌린 책 사진을 찢어 걸어 두다니. 가현이 나를 보며 웃는데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사진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면서 보면 그냥 하얘. 모델 얼굴엔 감정도 없고. 아름다운데 무서운 거 뭔지 알아? 막 그랬다니까. 모든 게 하얗고 뿌옇다…”

가현은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게 하얗게 변해 갔다고. 가끔 가현은 끝도 없이 아련해질 때가 있었다.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는 모습.


가현은 나를 형이라 불렀다. 사실 그렇게 듣는 편이 내게도 편했다. 그건 암묵적인 안전선였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나오는 안전선. 나는 너와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지금 이 관계에서 더 발전할 마음은 없지만 계속 곁에 있어줘. 노란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지나간다. 내가 가현이에게 형이 되고 가현이는 내게 동생이 되니 우리 둘 사이는 무해하다. 가현은 나를 형이라 부르며 자주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웬 무밥이야?”

“꽃 뿌리를 먹어 보고 싶다며.”


가현이 생각한 뿌리엔 무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을 거다. 가현이에게 놀이동산은 공룡 풍선인 것과 같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무를 사다 채 썰어 밥을 지었다. 가현은 군말 없이 무 밥을 먹었다. 그래. 이게 또 소화도 잘 되니까. 네가 더 이상 마음에 얹히는 것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가현은 대부분 해 주는 음식을 잘 먹었다. 사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내게도 일종의 안도였다. 가현이 밥을 잘 먹으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밥을 짓고 친한 동생은 그 밥을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가끔은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또 가끔은 그냥 버스 정류장을 3개 정도 지나며 걷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근처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도로 조명은 주황이고 우리는 하얗다. 가현을 택시 태워 보내고 집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나는 하얗다. 나는 그럼 좋은 기분 속에 잠이 든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잘 자요.


“어제는 내가 꽃집에 갔었거든.”

“네가? 네가 꽃 살 일이 뭐가 있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잘 들어봐. 내가 어제 꽃집에 갔단 말이야. 근데 꽃집에 꽃들이 다 뿌리가 잘려있는 거야.”

“그거야 보통 꽃집에 들어오는 꽃들은 다 그렇지 않아?”
“아니. 말 끊지 말라니까? 근데 그렇게 모두 뿌리가 잘려 있는 걸 보니까 마치 내가 죄지은 기분이랄까? 사실 꽃에게 뿌리는 목 같은 거 아니야?”

그래. 보통 고깃집에도 동물 머리를 놓지 않긴 하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다음부터 꽃을 살 땐. 진짜 꽃을 사고 싶어 졌어. 살아 있는 걸로.”

최민식 씨가 산 낙지를 먹는 장면이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그냥 요즘 불면증이 심해진 거 아니냐고 걱정해 줬다. 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집에 와서 먹으라 해야겠다.


집에 와 밥을 한다. 쌀은 물에 씻을 필요도 없다. 포장지에도 쓰여있다. ‘씻지 말고 밥 하세요’ 그냥 쌀 컵에 적정선까지 잘 맞춰 쌀을 채우고 물을 넣으면 밥이 된다. 예전 민수 형 카톡 상태 메시지가 한동안 ‘밥 물 장인’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누구나 장인이다. 사실 밥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가현은 내일 놀러 오겠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혼자 밥을 먹는다. 입 안에 뭔가 씹힌다. 돌이다. 예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오랜만에 느끼는 돌이다. “쌀을 씻을 땐 박박 씻어야 대.” 할머니는 직접 쌀을 지어 보내주셨다. “할머니, 쌀을 그렇게 세게 씻으면 쌀 영양분도 같이 씻긴대요.” 하지만 할머니는 쌀을 박박 씻었다.

입 안에서 딱딱한 걸 빼내었다. 돌이다. 작다. 나는 당황스럽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가현아 꽃의 뿌리는 아무 맛도 나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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