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나는 것들이 많아지곤 한다
"넌 요즘 뭐 하고 지내?"
"그냥. 그럭저럭 지내지."
"그게 뭐야."
"글쎄. 이게 뭘까."
미현이 웃는다. 그럼 나도 따라 웃는다. 네가 왜 웃는지는 잘 알지 못한 채.
미현이 갑자기 날 왜 찾았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웃는다.
“우리 만난 날도 참 오래되었다. 그렇지?”
미현은 웃는다. 돌이켜보면 나도 미현과 이렇게 오랜 인연을 이어갈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처음 신입생 O.T. 때도, 어쩌다 교양 수업 시간이 겹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차라리 미현이 날 지나가길 바랐다. 도망치기엔 미련이 가득했고, 고백하기엔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토록 찌질했다.
"이렇게 나와 밥도 사주고 진짜 고맙다. 의리 없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좀 철들었나?"
미현 전화를 받은 후 괜찮은 스테이크 집을 검색했다. 가격대를 비교하다 그냥 가장 예뻐 보이는 곳으로 골랐다. 나도 너 아니면 이런 데 올 일도 없지. 나도 이제 일을 시작했으니까. 미현에게 밥을 사주며 나는 내 존재감을 찾는다. 이왕이면 파스타보단 스테이크. 소주보단 와인으로. 알지도 못하는 와인 앞에서 아는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와인 가격이 2만 원이었다. 그러면 한 병 주는 건가? 고심해서 하나를 시키니 조그만 잔 하나가 나왔다. 이게? 미현과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너 마실래? 아냐. 너 마셔. 아니 같이 맛만 보자.
나는 몇 번이고 미현을 떠나보내는 상상을 했다. 집을 데려다주고, 밥을 사주고, 또 카페를 다녔을 때마다. 돌아가는 미현 뒷모습을 보며 저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았다. 그렇게 홀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홀로 미현과 내가 떠나면 그건 이별일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인 걸까 저울질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오랜 시간의 미련은 굳고 굳어 이제 나도 내 본심을 알지 못할 정도가 된다. 그냥 파도를 견디는 바다 부표처럼 나는 너의 연락에 휩쓸린다.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서울일 바쁘지 않아?"
"나 서울에서 내려온 지 꽤 됐어."
"정말? 뭐야. 왜 말 안 했어. 하던 일은 어떻게 하고?"
"잠시 쉬려고. 서울 살이도 너무 오래 했고. “
"그래? 오늘 만나길 잘했네. 좋은 식당 알아보길 잘했어."
"그래. 고맙다 야. 우울할 뻔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좋네."
미현은 그 조그만 와인을 마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편했기 때문인지, 조명 때문인지, 식당 분위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비켜야 할 때가 온다.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찌질해 지는 때가 온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나는 것들이 많아진다. 나는 여자들과 곧잘 친하게 지냈다. 그토록 나는 외로웠던 거다. 그렇게 내 친구들은 5년이 되고 10년이 되면 다 떠나게 된다. 나는 그중 무엇도 붙잡지 못한 채 떠내려 간다. 그게 아직 오늘은 아님에, 오늘은 외롭지 않을 거란 생각에 나는 괜찮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해도 나는 너의 웃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걸로 괜찮다. 아직은 미현 옆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아직은, 내가 곁에 있어도 되는 것 같아 안심한다.
"요즘 무슨 생각해?"
미현이 묻는다.
"나?"
"응."
"뭐. 별거 없지. 언제나 마음의 평화 유지랄까."
"에이 또 시시해."
"뭐가?"
"매번 그렇잖아. 넌 매번 니 얘기 잘 안 하잖아."
미현은 그리곤 웃는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장단을 맞춘다.
"그러게."
"그래도 뭐 좋아. 오늘 기분 좋네."
가게를 나오니 이미 밤이다. 잘 가. 미현은 별 이야기 없이 떠난다. 미현이 모습이 인파에 묻혀 사라질 때쯤 가현이 생각났다.
핸드폰엔 메시지 하나가 와 있다.
'다음엔 내가 원하는 거 아무거나 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