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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May 31. 2024

모퉁이를 돌아 다시 나오다

2만 보와 크록스




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멋진 세계가 있으리라고 믿어요.
길모퉁이란 그 앞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모르는데
 매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린게이블스의 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일들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때때로 숨이 차서 힘들다가도 또 어떤 날은 버티고 서서 묵묵히 해 나갈 일들이 많다. 그리고 나서 모퉁이를 돌아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벅찬 마음과 안도감, 넘어섰다는 뿌듯한 감동의 순간들이다.


마치 앤이 했던 말처럼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두렵기도 하지만) 기대감은 커지 되넘어서게 될 일들은 어쩌면 내게 더 소중고 가치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날이 좋아 햇살이 성큼 빨라진 만큼 여름은 다가오고 있다. 연둣빛 뾰족함이 제법 무성해져 온 지천이 꽃밭과 나무의 사각거림으로 푸른 바람이 이는 요즘이다. 햇살은 우리를 밖으로 당겨 낸다. 겨우내 웅크린 만큼 녹여진 마음은 주전자에 물이 은근히 데워지듯 살살 올라와 활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가장 좋은 날이다.


 아이들과 가까운 거리를 걷기로 했다. 진천 농다리는 10시가 안 되었음에도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빠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주차장이 만석이라 제일 끝 4 주차장까지 가서야 겨우 주차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주차장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길을 도란도란 족이 함께 해서 좋았다. 우리가 걸어갈 길들은 눈 앞의 새로움이고,  하루가 지나면 또 다른 추억의 책갈피를 끼워갈 날이기 설레는 기분들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하고 걸어가는 내내 풀꽃에 일렁이는 바람이 파도처럼 살며시 흔들린다. 막내딸 손을 잡고 가는 길은 온통 꽃밭이요. 최고의 자연을 공짜로 만끽하는 최상의 정원이다. 호수 따라 습지 식물이 심겨 있어 유유자적 물속의 생물들이 숨고 놀기 좋은 환경이다.     

 


농다리 입구로 걸어 지나는 길


 차가 다니는 도로변 따라 자라는 생명력은 저마다 계절을 품어 내고 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은 눈에 들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여백을 채워가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애틋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느껴지는 자연의 신비감이 요새 부쩍 감동스러워 더 눈이 가고 신경이 간다. 몰두하여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으로 찍어 검색하면 이름을 바로 알아낼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풀꽃에도 이름이 있기에 눈을 맞추고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입에 감기지 않은 생소함은 또 다른 일상을 찾아가는 소소한 행복으로 다가온다.


별꽃과 가는 등갈퀴



 돌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농다리를 지나 초평저수지 둘레길을 걸어 하늘다리와 흔들 다리를 돌고 나오기로 했다. 둘레길 안내도를 보며 저수지를 근접한 안쪽으로 걸어서 돌기로 하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운동화 대신 크록스를 신고 온 셋째가 살짝 걱정스러웠지만 평지인 데다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출발했다. 가방에 간식과 물이 있으니 중간중간 쉬어가며 만끽할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아 모두 상기된 표정이다.   

        

 얼마간 걸으니 표지판이 보이고 양쪽으로 사람들이 갈리기 시작한다. 왼쪽은 미호강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은 시멘트로 곱게 포장되어 출렁다리로 향하는 입구였다. 양쪽 길에서 우리는 좌측으로 이동하여 산길로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나무마다 들리는 새소리가 먹이를 물고 온 소리인지, 사람들을 반기는 소리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맑고 청아한 그 소리는 필히 따뜻하고 아름다워진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소리라는 것이다.      


 지천으로 핀 노란 금계국은 더욱더 화사한 노란색을 품어내고 있고 그 위에 살포시 앉은 호랑나비들 쉬어가는 자리가 되어주고 있다. 향기가 만나 이루는 환상의 조합이다. 눈에 든 것들이 너무 예뻐 한참을 서 있었다. 다람쥐가 귀여운 포즈로 산길을 탄다. 막내 아이를 급하게 불러 세워 가까이 보여 준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보지 못할 것들이 가까이 널려 있다.     

 

금계국 꽃밭


 “와우!”를 연발하며 걸어가는 사이 또 다른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저수지를 낀 하늘다리로 향하는 길이었고 좌측은 미호강 전망대와 마을로 이어져 하늘다리 방향을 도는 길이었다. 막내가 좌측으로 가보자 한다. 나뭇가지를 퉁겨 가리키는 방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길이기도 하고 모처럼 걷기 시작하여 아무 길이라도 좋았다. 제법 잘 걷는 아이가 대견스러워질 때쯤 햇볕은 강해지고 더운 날씨에 온도가 올라가 이내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물을 찾고 어디까지 나올지 모르는 길 앞에서 이정표를 찾느라 분주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진 길은 산으로 이어진 가장 바깥 부분으로 다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맞은편에 사람들이 보여 얼른 달려가 어느 길로 가면 다시 하늘다리가 나오는지 물었다.    

  

 “여기로 가도 상관없는데 멀리 돌아 돌아야 하고 우리처럼 웬만한 산 타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들어요. 다시 돌아가는 것이 빠를 거예요”      


 청천벽력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어느 길로 돌고 돌아 다시 나온 것인가!  오래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더운 날씨가 애석하다. 그러나 맘을 고쳐먹어야 한다. 어쨌든 돌아가야 하기에,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즐기는 것이 낫다. 문제는 아이가 오래 버티는가이다. 다시 ‘으쌰으쌰’ 힘을 내어 걸어보기로 한다.


 돌어가는 길에 맞은편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산을 쓴 화장한 아주머니와 그 일행 역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더 헤매지 않도록 부리나케 우리도 다시 아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이의 뒷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돌아서 나간 길에 이정표가 나온다. 농다리로 향하는 길과 하늘다리로 향하는 길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늘다리와 출렁다리이기에 하늘다리 방향으로 향했다. 목적지 방향은 이내 두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한 곳은 산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가파른 경사인 데다가 0.6km가 남은 반면 다른 한 곳은 평탄한 길이고 1.1km가 남았다.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조금 더 걷더라도 평지 쪽으로 순탄하게 걸어가는 것으로 발걸음을 옮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가다 보니 평지가 산길로 이어져 이내 가파른 경사가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운동화라 괜찮은데 크록스를 신고 온 셋째가 울상이다. 땀이 흐르듯 호흡마저 가파른데 ‘영차영차’ 응원하며 끌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금 전까지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눈앞에 현실로 깊숙이 이어져 있다. 산악회 회원들이 장비를 갖추고 이동하는 사이 우리는 난간 대신 매어진 줄을 잡고 겨우겨우 이동한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평지를 걸으며 ‘다리 아프다’고 말하던 막내가 돌연 다람쥐가 된다. 어디서 그 힘이 나오는지 변화의 환경 앞에 가장 빠르고 민첩하게 적응하여 그 산을 오른다. 순탄하지 않은 좁은 산길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내 잘 따라와 주는 아이가 대견하기만 하다. ‘삐악삐악’ 못 간다고 할 법한데 어른들보다 더 강하다. 역시 자연의 힘인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떼를 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은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해 가는 것들이 있다, 이것 역시 자연이 주는 순리인지라 자연스럽게 경험해 갈 일 앞에 남겨질 것들은 함께 있더라도 혼자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필요한 것임을 아는 순간이 온다.     


 인생에서 앞으로 이어진 길들은 언제 경사가 있을지, 평탄할지 결코 알 수 없다. 설령 경사가 없더라고 어떤 위험이 버틸지 모른다. 그러나 겪어가는 과정에서 부딪쳐 얻는 경험은 새로운 생각의 덩이를 부풀려 두려움보다는 해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것을 지나고 나서의 뿌듯함은 자신만이 아는 희열이다.    


  

지칭개


 가까스로 오르막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내리막이 나온다. 그마저 호흡은 덜 가쁘나 역시 경사가 남달라 쉬운 길이 아니다. 계속해서 앞쪽으로 쏠리는 무게로 발이 ‘퉁퉁’ 부어가는 느낌이 들 때쯤 멀리 하늘다리가 보이고 드디어 우리는 도착했다. 예상 시간 2시간 거리가 4시간 이상이 되고 가볍게 걷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오늘의 2만 보 걷기에서 알아낸 사실이 있다.


 자연의 이로움 앞에 만나는 일들은 모르기에 선택하는 것에서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다. 그 사실을 은근히 받아들이며 온전히 걸어갈 때 그 끝이 보인다는 것, 앤의 말처럼 모퉁이를 돌면 어떤 길이 나올지 지금 모르지만 그 안에 기대감을 품이루어가는 사이 두려움을 떨치는 나만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끝은 곧 또 다른 시작이기에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앤을 통해 알아간다.


 무엇보다 크록스를 신은 십 대 아이와 9살 아이가 걸어간 길마다 다져진 오늘의  걷기 성공 가장 최고의 날로 충분히 여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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