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교정을 밟는다. 여름의 기운은 여전하나 제법 부는 바람은 가을을 속삭인다. 아주 멀리 있지 않은 느낌의 다가옴은 나무를 드리운 그늘 안에서 조금씩 노크하듯 두들길 준비를 한다. 문만 열면 곧 가을이 성큼 올 것만 같다. 햇빛은 따가우나 눈부심이 덜한 이유는 하늘이 맑기 때문이다. 온통 드리운 하늘의 색도 머지않아 가을의 쾌청한 하늘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꼬박꼬박 절기를 따라 계절의 변화는 흐름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으니 그 안에 담긴 이치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비록 환경오염으로 약간의 변동은 있지만 그럴수록 지켜야 할 소명이라 느끼며).
가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으니 이곳도 개강 준비에 여념이 없다. 2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임상으로 실습을 나가는 4학년 간호학과 한 분반을 대상으로 실습 지도를 하게 되었다. 임상에 몸담아 여기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토대로 알려줄 기회가 내게 찾아온 것이다. 절기의 흐름대로 계절이 지나는 만큼 나도 간호의 절기를 따라 잘 흘러왔다. 계절의 변화만큼 간호하는 순간에도 우여곡절 안에 만나가는 보람과 고통에 대한 양면성은 종이 한 장 차이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뒤집혀간다. 이것이 쌓여 두고두고 남겨질 경험으로 이루어가는 지금을 만들고 있으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고통과 보람, 뿌듯함은 서로 멀리 있으나 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충분의 관계인가 보다.
기회는 어쩌면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고, 알려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마음가짐을 만든다. 정확하고 진정성 있게 알려주려면 내가 잘 알아야 함을 느낀다. 나만의 방식만 고집하기보다 근거를 바탕으로 도출할 수 있게 지지하려면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소통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경험 안에 부딪히는 일들을 잘 알아듣고 나아갈 힘이 있어야 하며 처음의 기본 마음 자세를 떠올려 자만하지 않고 발전된 방향으로 함께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자신감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 또한 두드리면 문은 열리리라 믿는다.
교정을 밟아 걸어가는 내내 밝은 기운이 물씬 풍겨 온다. 20대의 기운이 여기저기서 폴폴 묻어난다. 다음 주면 개강이라 그때가 되면 저마다의 청춘이 이곳을 가득 누빌 것이다. 초록만큼 푸르러갈 청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니 활기가 저절로 생기는 게 당연한가 보다. 또 다른 처음을 마주할 설렘이 내 앞에 있다. 설렘을 안고 문을 열고 ‘영차’ 들어간다.
오늘 나는 순서대로 배정된 학생들(1:1) 대상으로 시나리오상의 사례를 제시하여 피내주사와 배출 관장에 대한 핵심 술기와 그에 따른 이론적 지식을 평가 관리해야 한다. 실습지도 강의실은 영역에 따른 핵심 술기 평가를 위한 장비와 물품이 놓여 있다. 핵심 술기는 간단한 것 같지만 의외로 섬세함과 집중을 요구한다. 지식과 기술을 접목하여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야 한다.
피내주사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손 위생을 기본으로 하여 멸균을 유지하면서 약물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먼저 투약 카드를 보고 5 RIGHT에 맞춰 정확한 약물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 5CC 주사기와 1CC 주사기를 준비하고 분말 항생제를 희석할 주사용 증류수를 준비한다.
항생제 반응검사를 위해 여기에서 정확한 양을 뽑아내야 하는데 평가를 받는 입장에선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집중해서 쳐다보는 나의 눈빛(안경까지 더하니 눈이 4개)도 신경 써야 하고 중간에 절차를 말로 표현하며 행위를 해야 하고 이 와중에 순서대로 과정을 기억하면서 멸균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항생제 반응검사 준비가 끝나면 드디어 환자(마네킹) 에게 다가가 자기소개하고 손 위생을 하며 환자 확인을 정확하게 하는 방법을 관찰하며 평가하기 시작한다. 목적과 절차를 설명하고 행위하는 사이사이에이론적 지식을 곁들여 질문하면서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로 습득되었는지 확인한다. 피내주사 후 부작용 여부나 주의사항을 안내하고 일정 시간(15분) 경과 후 정확한 판독까지 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결과에 따라 음성이면 주사 후 간호기록까지 남겨야 하니 항생제 반응검사 하나를 하기 위해 여러모로 접근해야 하는 영역의 범위는 넓을 수밖에 없다.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적용하고, 감염관리, 멸균 유지, 소독, 환자 안전과 의사소통 기술과 더불어 교육자, 기록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생각해 보니 같이 일하고 있는 후배간호사들의 경우만 해도 여러 간호 처치와 교육과 더불어 전자의무기록 작성을 위해 전산으로 간호기록뿐 아니라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저장해야 하니 타자 수준은 말도 못 하게 빠르다(앉아 있다고 해서 노는 것이 아님).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은 손놀림이다.
기본 간호학을 토대로 연습하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은 확실히 티가 난다. 너무 긴장해서 나오는 긴장감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나오는 행동의 불안감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수준의 차이가 여기서 발견이 되니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나도 초반에는(지금도 그럴 테지만) 누군가가 지켜보는평가 앞에서는 준비 여부에 상관없이 일단 머리가 하얘지고 다리가 후들후들하며 수전증이 있나 의심할 정도로 손까지 덜덜 떨며 긴장한 적이 있다.
평가의 자리는 오래도록 익숙지 않은 부담감이 있다. 익숙하기까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인내하여야 점차 숙달된 모습으로 발전한다. 익숙해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열정도 따라온다. 해낼 수 있다는 잠재력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그 긴장감을 다른 눈으로 보면 그 모습마저도 귀엽고 예뻐 보이지만 정확하게 해야 하니 ‘흠흠’ 헛기침하며 이내 평가자 모드로 돌아온다. 약간의 긴장감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실습하며 긴장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오히려 귀엽기만 하다. 잘해보려는 태도에 묻은 긴장감은 처음의 서툼이 콕콕 박혀 있지만 참으로 어여쁜 청춘들이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까지 자신이 쌓아 올린 것으로의 이해로 다가온다. 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평가 앞에서 누구나 긴장을 하게 되니 시작에 앞서 그들 안의 또 다른 자아를 건드려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자신감을 가지고 해 보자고 격려한다. 앞으로의 간호 업무에 있어 지금의 배움들이 크게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졸업 후 학교에서 배운 것뿐만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다시 배우고 다져야 할 일들은 더 많아진다. 학생 신분에서는 학교와 가정이 울타리가 되어 주지만 졸업 후 사회로 나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롯이 자신이 책임을 다해야 하는 시점이 오는 것이다. 특히 간호사는 환자가 안전하도록 정확한 방법으로 행해야 할 소신이 있어야 하기에 생명 앞에서의 다짐들은 작은 것에도 커다란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간호함에 있어 작은 것과 사소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회복과 누군가의 안정과 누군가의 행복은 또 다른 누군가의 정성과 손길로 탄생하게 되니 지금 이 순간이 학생들에게는 그 초입을 다지는 일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설렘을 가득 안고 앞으로의 미래를 꿈꿀 간호사들이 될 것이기에 가장 큰 격려를 해주고 싶다. 참으로 잘하고 있으니 두려워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누구나 처음은 있다고. 자신의 마음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아무렇게나 내던지지 않도록 잘 토닥여가며 귀하게 귀하게 커 갈 수 있도록 옆에서 단단한 응원을 보낸다. 초록의 무성함이 절정으로 치솟아 참으로 푸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