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두가 꽃

우리 있는 그대로

by 현정아

시작되는 봄은 돌보지 않았던 황량한 빈자리마다 가만가만 새싹을 퍼트리고 있다. 기어코 일어나는 봄. 숨겨진 보물을 터트리듯 일제히 시작된다. 봄은 연결이기에 시작은 여기저기서 동시에 불을 켠다.


웅크려진 마음이 일어난다. 지나치던 길가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그맣고 기쁜 색이 너도나도 바람에 흔들린다. 그래서 시인은 봄을 그렇게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나 보다. 요새 읽는 김용택 시인의 3월의 시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시집만 보아도 그렇다.



<한봄>


김용택


1월이 가서 좋다

2월이 가서 좋다

3월이 와서 좋다

나는 이제 우리 나이

일흔여덟 살의 3월로 돌아왔다


길가에 핀 나무의 꽃물, 일제히 돋아나는 어린 새싹들, 나무마다 일렁이는 열린 연둣빛 물결을 서서 보노라면 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탄생이 없다. 일상에서 만나는 순간은 지나는 시점마다의 공간 안에 무언으로 연결 지어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진실이 존재한다.


내가 보지 못하는 진실과 보이는 진실 사이는 큰 틈이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의 틈을 이어 연결하는 것이 존재의 힘으로 얻어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계절마다 나는 있다는 사실과 그때마다의 봄은 다르다는 진실 앞에 나는 무엇을 보아 가고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감동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할지 배워가는 봄이다. 지금 봄을 만나는 순간이 그저 감사함이라 놀라운 탄생의 비밀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진다.


김용택 시인의 시집 아포리즘 중 일부인 <봄 물소리처럼 가난하게 서 보자>의 내용이 지금과 맞닿아 어떤 마음으로 지금을 열어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〇 늘 보이던 것들이 오늘 새로 보이면 그것이 사랑이다. 아니면 이별이거나. p.34


〇 당신 속에는 꽃이 숨어 있다. 아니 꽃 속에 당신이 숨어 있다. 세상으로 이어진 모든 끈을 놓는 아름다운 자유, 나를 풀어버리는 해방,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광기, 그게 꽃이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꽃이다. p.34


〇 목마른 대지에 비 내리다. 강 건너 마을 뒤에 은행나무도 샛노랗게 젖다. 젖어 산이, 강이, 빈 들이, 젖어 천천히 오래 눕다. 내 마음이 젖지 않으면 저 아름다운 젖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 p.35


〇 무엇이든 바라보아야 생각이 우러나온다. 나무를 보고, 꽃을 보고,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아야 생각이 쌓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쌓이고, 생각이 모여들고, 생각이 넓어지면 사람들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의 질서를 배운다. p.40


내가 젖지 않으면 아름다운 젖음이 무슨 소용인가! 저절로 나를 이끄는 문장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떤 시선으로 열어 갈지 그리워하고 설레게 만든다. 지난봄의 빛깔과 지금이 다르다. 매년 피는 민들레는 다른 곳에서 피어난다. 작은 홀씨가 퍼트린 세상만큼 이동한다. 일제히 일어난다. 뽀얀 샛노란, 하얀 얼굴을 드리운다. 나도 민들레가 되어 본다. 내가 젖어야 그 아름다움을 졸 수 있기에. 지금의 나이에만 만날 수 있기에.


마음은 마음을 연다. 한병철 철학자는 『서사의 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우라는 곧 ‘바라보는 대상에서 생겨난 시선의 거리’다. 친밀하게 바라보면 사물들은 그 시선에 응답한다. “관찰된 존재 또는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시선을 열어 낸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곧 시선을 열어 낼 능력을 현상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p.82



시처럼 내가 그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마음을 열어 낸다. 보이는 곳마다 퍼지는 감흥이 그렇고 어루만지어 눈 맞추고 싶은 감동이 그것이다. 그들의 아우라가 지금 나를 이끈다. 그렇기에 행복하다. 작은 소소한 행복이 그들과의 교감으로 완성된다. 스스로 느끼는 삶이다.


행복은 하나의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까지 닿아 있는 긴 꼬리를 갖는다. 그것은 살면서 거쳐 온 모든 것을 먹고 자란다. 잠시 반짝거린 빛이 아닌 후광이 그것의 현상을 나타내는 형식이다. p.40


3월이 가고 4월이 와도 좋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점점 소중해진다는 의미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아주 작은 만남, 관찰, 받아들임, 열어 냄, 마주함, 그대로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수집된다.


함께 나누는 일상의 대화가 그래서 좋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 나중은 없다는 마음이 한창의 나를 있는 그대로의 시간 안에 머물게 한다. 꽃을 꽃으로, 나무는 나무로, 바람은 바람으로, 비는 비대로 그대로 받아들여 나의 영감 안에 사로잡는 일상의 순간이 행복이다. 행복은 지나지만 꼬리처럼 이어져 번져 간다.


다시 김용택 시인의 아포리즘 일부를 이어가 본다.


〇 이 세상의 수많은 별이 저렇게 반짝이며 살아가듯이 인생도 그러하다. 누구의 삶이 더 빛나고 누구의 삶이 더 희미한 것은 아니다. 삶은 다 반짝인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별이 반짝이듯이 지상의 모든 사람도 반짝인다.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 가만히 놓여 있는 돌멩이 하나가 다 지상의 것이다. 삶의 뜻이다. p.37


거창한 곳으로 여행 가지 않아도 된다. 웅장한 꽃의 정원이 아니어도 좋다. 도시의 나무 그늘 안에도, 보도블록 틈 사이 새싹에도 눈을 맞추어가는 찰나의 기쁨에도 신비가 존재한다. 커피를 마시며 컵에 새겨진 그림 하나에도 일상이 주는 자연과 나의 만남은 존재한다. 그것을 바라볼 시선을 열어가는 지금 그래서 우리가 모두 꽃인가 보다.


KakaoTalk_20250427_201204266.jpg 제비꽃 사이로 사랑 말고는 뛰지 말자
KakaoTalk_20250427_201204266_01.jpg 3월의 시집
KakaoTalk_20250427_201204266_02.jpg 다 지상의 것인 삶의 뜻
KakaoTalk_20250427_201204266_03.jpg 꽃으로 피어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pro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