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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16. 2022

생각 하나 때문에 마음이 온통 허물어지듯

  

 무지

누가 그랬다 고구마를 오래 보관하려면 하나하나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라고
말리는 것을 빼먹어서 그런가 집이 유독 서늘해서 그런가 박스에 구멍까지 냈는데
어쩜 이럴 수가 있나 절반이 물러버렸네
싹이 난 것도 곰팡이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저 버려진 나무토막 힘없이 썩어가는 모양새네
푸석한 듯 얼어있는 듯
엊그제까지 멀쩡하더니 무슨 약속처럼 일제히 이런가
이번엔 실온에 둔다고 안에 들였어도 증상은 같았네
선연한 눈빛 붉고도 단단했던 고구마
그의 단내 나는 인내는 어디 갔는가
물렁한 몸에 붙어있는 잘못 품은 한기
잘못 들어온 위로, 문턱에서 깨진
잘못된 바람 한 줌


감자가 나오고 있다. 몇 해전까지만 해도 '하지 감자'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엔 그 말이 참 낯설다. 과일이나 채소에 제철이 없어지고 있다. 감자도 진즉 나오기 시작했다. 감자를 잘 찌면 살짝 금이 가면서 껍질이 일어난다. 그렇게 알맞게 익은 것은 맛이 포슬포슬하고 포근하다. 감자를 먹고 있으면 왠지 행복해질 때가 있다. 굳이 반 고흐의 감자를 떠올리지 않아도 한 접시의 감자 앞에서 마음이 순해지고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감자 서너 알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먹는 것으로부터의 놓여남이 있다. 기름지고 달고 매콤하고 자극적인 음식에서 놓여나는, 소박하고 단순하고 담담한 맛이라고 할까. 그렇게 단순하고 담담한 맛으로도 한 끼를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도 있다. 튀기고, 볶고, 굽고, 양념하고, 데치고, 무치고, 하는 복잡한 과정 없이 간단히 찌기만 해서 소금에 찍어먹는 것도 그렇다. 복잡함을 뺀 단순함이 주는 편리함 위에 편암함까지 있는 것이다.


 감자만큼이나 소중한 음식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고구마일 것이다. 감자는 봄부터 여름까지, 고구마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우리의 허기를 메워주는 중요한 식량이다. 감자는 찌는 시간이 길지만 고구마는 그것보다 좀 짧아서 사실은 감자보다 더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소금도 필요 없으니까.


 막 가을이 시작되면, 마트에는 붉은 고구마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붉고 굵은 고구마를 보면 달달하고 포근포근한 맛이 떠오른다. 감자가 달지 않은 포근함이라면 고구마는 달콤한 포근함이다. 감자보다는 덜 좋아하지만 고구마 역시 부담 없이 좋아한다.


 작년 겨울이었다. 자주 사기가 번거로워서 고구마 한 박스를 샀다. 유독 단단해 보이고 붉은 기운이 선명했다. 뿌리식물은 냉장고에 넣지 말고 실온에서 보관하라 했다. 특히 고구마는 차가운데 두지 말고 따뜻하게 두어야 한단다. 그래서 옛날에는 방 윗목에 고구마 포대가 있었다. 나는 방 윗목 대신 다용도실을 택했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라 아파트 다용도실보다 춥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거실은 온도가 너무 높을 거라 생각했다. 나름 살림에 능한 지인으로부터 보관법을 건네 듣고 그대로 하나씩 일일이 신문지로 쌌다.


 보름쯤 지났을까?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열어보았을때, 고구마는 아, 절반 넘게 물러있었다. 그때 그 순간의 놀라운 느낌이란... 신문지에 싸인 고구마를 집어 들었을 때의 그 물렁함, 손으로 조금 눌러보니 허망하게 쑥 들어갔던 느낌. 이게 어쩐 일이지? 하고 신문지를 열었을 때 핏기가 걷힌 고구마의 푸석한 모습. 한두 개도 아니었다. 서너 개만 온전하고 나머지는 거의 그렇게 못쓰게 물러져 있었다. 아깝고 또 아까웠다. 예상했던 밤고구마의 맛을 보지 못해서도 그렇고, 일일이 신문지에 쌌던 수고도 그랬다. 그깟 고구마 가지고 웬 난리람? 하는 생각도 일었지만, 한참동안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또 한 박스를 샀다. 이번엔 거실에 놓아두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이 겨울에는 유독 춥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 싫었다.

 

 물러터지고 못쓰게 되는 것을 납득할 수 없고 인정하기 싫은 마음,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토록 고구마를 아깝게 생각하고 두 번에 걸쳐 무모한 실수를 반복했던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 때문이었다.

 자꾸 고구마가 '나'인 것 같았다.. 물러버린 고구마가 물러터지고 짓눌린 '나'의 모습 같았다. 고구마가 '나'일리는 없지만, 고구마는 고구마이고 '나'는 '나'이겠지만,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습성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습관이 있겠지만, 나는 그 사건에서 자꾸 비유를 읽어내는 것이다.


 내가 잘못 놓인 것 같은 느낌, 공연히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춥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숨구멍조차 막혀버린, 그래서 밖으로 내뿜지 못한 숨을 안으로 안으로 집어넣다가 살덩이 안을 모두 구멍 내 버린, 그래서 제 스스로 얼마 못 가 허물어져버린... 그런 느낌 말이다.

 어느 한순간 몸에 들어온 한기를 물리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 '아니다'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만 있었던, 두 눈을 가린 채로 몸뚱이 하나만 붙들고 있었던... 그런 모습에서 올라오는 느낌 말이다.


 밀쳐내지 못한 기억과 느낌이 살아있다. 단단하고 붉은 몸 대신에 잘못 품은 한기와 같은 헛된 생각이 살아있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이 거짓으로 살아있다. 그 잘못 품은 한기는 잘못 품은 생각이다. 내가 한순간 잘못 품은 생각 하나가 나의 전체를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 내가 읽어내고자 하는 비유는 이것이었구나.


 내가 잘못 품었던 생각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생각을 잘못 품어서 온 몸이 허물어지도록 아프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다. 막상 내가 잘못 품은 생각이 뭐지?라고 반문한다. 반문하는 것이 낯설다.

마치 나는 불행하다, 행복하지 않다
라는 사실을 문장 그대로 지니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어느 누가 다가와서 행복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나는 행복한가?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답변하기에는 무엇인지 부족한 것 같고,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이 전부 갖추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이 모조리 성취되었을 때, 그 나중에 찾아오는 결과물이란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나는 그 최종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불행하지는 않지만 , 행복하지도 않다고 늘 행복을 유보해놓고 살고 있다. 행복은 미래의 일이고 현재는 항상 미완성이다.


 내가 잘못 품었던 생각 하나: 나는 늘 잘못하고 있다

 내가 잘못 품었던 생각 하나: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내가 잘못 품었던 생각 하나: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선언문 읽듯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생각 하나하나를 세어 본다. 무엇보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행복의 정의'일 것이다. 지금이 곧 행복이라는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이라는데...


 얼어버린  고구마 두 박스의 기억이 자꾸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있었던 것은 이 해답을 얻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나는 잘못 놓였던 고구마에서 자칫 잘못 품을 수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생각 하나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 하나가 얼마나 인생 전체를 무의미하게 돌려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생각 하나가 인생을 얼마만큼 크게 돌려세울 수 있는지.


 고구마 하나 가지고 별 생각을 다했다. 올 가을에는 고구마와 우리 집의 성질을 잘 알아서 보관을 잘해 보리라. 물론 감자도. 그래서  오랫동안 달달하고 포근한 맛, 그리고 담담한 맛을 즐겨 보리라!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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