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교육 / 첫 번째이야기
첫 글을 시작하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육아를 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속에 늘 담고 있는, 때로는 심각하게 툭 터져 나오는 질문 같습니다. 8살, 6살 남매를 키우고 있는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어렵기만 합니다.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교육에 대한 제 소신을 조심스레 밝힐 때면 "아이들이 어릴 땐 나도 그랬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며 '진짜 교육 현장'에 한 발짝 발을 딛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만, 아이들과 내 소신을 믿는 마음으로 걱정을 덜어 내어 봅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교육에 '소소 교육'이라는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소소하다'는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뜻도 있지만, 밝고 환하다는 뜻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소신을 갖고, 작은 움직임으로, 아이와 밝고 환하게 교육 제도의 긴 터널을 지나가길 소망합니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12년 동안 나는 우리나라 공교육에 대해 어떤 이견도 제기해본 적이 없었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착실하게 책상에 앉아있었던 학생이었고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은 그저 딸 셋이 대학교만 나오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계셨을 뿐, 공부나 성적으로 우리들의 자존감을 낮추는 법은 없으셨다. 그렇다고 사교육을 억지로 받아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다. 집안 형편 상, 몇 달 정도 단과학원에 다녀본 게 다였으니, 사교육이나 성적에 대한 압박 때문에 외부로부터 스트레스를 크게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단지, 타고난 승부욕 때문에 성적이 오르고 떨어짐에 혼자 괴로워한 적은 많았어도).
그런데.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갑자기 '유아기 학습' '선행 학습' '사교육' '입시 제도' 이런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왜 이런 부조리함이 보이지 않았을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으면서도 "왜 어른들은 성적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건가요?" 스스로 따져보지 못했고 "일단 대학부터 가서 너 하고 싶은 것 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해본 적도 없던 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운 좋게 성적 때문에 크게 무시당해 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선생님의 칭찬에 우쭐한 적이 많았다. 학급 친구들 중 누군가는 분명 '성적'이라는 잣대에 상처 받고 힘들어했을 텐데 그때의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공부할 게 얼마나 많은데..'라는 생각으로 주변의 상황을 외면했을지도 모르고, 입시라는 목표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는 남 걱정할 시간 같은 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늦게서야 아이들의 시선에서 교육과 성적 중시 사회를 바라보는 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싶은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육아서와 청소년 소설 등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문장들을 기록하면서부터. 책을 읽다 보면 비슷한 지점에서 자꾸만 밑줄을 긋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지점은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될 때도 있고, 미처 몰랐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중요한 가치였음을 깨닫는 순간도 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던 스물일곱 살 때 즈음,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에서 박영숙 관장님의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시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내가 읽었던 책 중 첫 육아서로 분류될 법한 책이 박영숙 관장님의 책이었던 건 나에게는 참 행운이었다.
타고난 호기심에 굳은살이 박이기 전에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할 수는 없을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전에 어울리는 기쁨을 누리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러다 꽃을 피우겠지. 벌써부터 제 안에 품고 있던 씨앗이 꽃잎이 되고 꽃받침이 되어 향기를 뿜으며
망울을 터뜨릴 날이 있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꽃이 피면 놀라고 기뻐해 주는 일.
그런 비빌 언덕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당시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키워본 적 없는 나였지만 만약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저런 마음을 품고 싶다며 보이지 않게 밑줄을 그은 구절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하고 첫째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사서 다시 읽게 되었는데 작가님의 아이에 대한 존중, 사람 중심적인 생각들에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했다.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라는 제목은 마치 <내 아이의 세상을 배운다>라는 또 다른 제목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태어나서 3살 정도까지 육아책을 제일 많이 읽었다. 아마도 모든 것이 처음이고, 서툴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또 매일 비슷한 일상인데 내 마음은 날마다 오르락내리락 즐거웠다가 화나고 슬프고, 이 감정에 대한 해답과 육아의 해답이 책 어딘가에는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내 마음을 위로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도서관에 가면 육아책만 한가득 빌려 틈만 나면 읽었다.
첫째가 돌 즈음, 한창 서툴고 힘든 육아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오소희 작가님의 책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를 만났다.
육아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할 대상도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며, 그저 이 순간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만 충분한 일이라고. 학습지나 학원의 부추김에 호응하면서 초조하게 결과물을 채근하는 날 선 부모의 역할에서 한 번쯤 벗어나, 물속에 고기를 놓아주듯이, 새장의 문을 열어주듯이, 지금 눈앞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탐스럽게 하루하루 허벅지 굵기를 키워가는 아이의 다시없을 한 순간을 그저 어깨에서 힘 빼고 즐겨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이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힘들게만 느껴지는 육아는 어쩌면 부모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당시 뭐든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없어 좌절하고 스트레스받을 때가 많았기에)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가져보려 애썼다. 아이들이 커서도 결과물을 채근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순간순간을 그저 지켜봐 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박혜란 선생님의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을 읽으며 아이들은 키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크는 존재라는 것, 믿는 만큼 자라는 신기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커다란 믿음을 마음에 심었다. 뭘 해주려는 생각보다는 그저 믿고 존중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작가님의 생각, 아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은 갖되 강요하지 않는 작가님의 태도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어 마음에 콕 박혔다. 아이는 자기가 흥미를 가지면 저절로 배우게 되어 있다(p64)는 문장은 아이의 학습에 대한 조바심을 거두게 했다.
이렇게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세 명의 작가님들, 그리고 책에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을 보면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무언가를 요구하고 채근하는 대신, 맘껏 헤엄치면서 자라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을. 한국 사회에서 입시 제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성적과 학벌이 중시된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속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대안들이 나에게는 불편하다면, 아이와의 시간을 좀 더 편하게 해 줄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아이 교육에 있어서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맞닿는 소신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