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교육 세 번째 이야기
내가 스물네 살, 첫 직장에 들어가든 해 언니가 첫째를 낳았다. 언니가 살던 대구 근처에 출장이 있을 때마다 조카가 보고 싶어서 언니 집에서 며칠을 머물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언니 집에 가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몇 권씩 쌓여있었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했던 언니였기에 바쁜 육아 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고 언니는 첫째가 다섯 살 되든 해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아이와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언니 집에 가면 냉장고에 요일별 일과표 비슷한 게 붙어 있었는데, 공원 가기, 저수지 산책, 도서관 가기, 집에서 놀이하기 등 다양한 활동들로 채워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친정엄마와 아빠는 언니가 단유 할 때 아파트 단지가 떠들썩하게 며칠이고 크게 울던 첫째가 예민하다, 유별나다고 했지만 언니는 아이의 감정 코칭 육아 책들을 읽으며 아이 마음을 읽어주고 이해해주려 노력했다. 언니를 닮아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던 조카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학원을 더 일찍 보내는 건데 내가 잘못 생각했지..."
"어릴 때 실컷 놀라고 놀이터에서, 워터파크에서 해질 때까지 문 닫을 때까지 기다려준 내 잘못이야. 통제 능력을 배우게 했어야 하는데. 주변에서 그냥 이건 해야 하는 거라고 간단히 말하면 된다고, 아이 의견을 왜 그렇게 물어보냐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언니는 뒤늦게 후회했고 자책했다. 10여 년이 넘는 육아의 노력과 아이와의 시간을 성적과 주변 평가 때문에 부정하고 후회하는 언니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은 아이의 성적이 곧 부모의 책임 및 역할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언니가 그동안 잘 해왔다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까지 그 책이 좋다, 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아이의 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갖고 있고 그 가치를 목표로 육아와 교육의 방향을 정했다면 힘은 들더라도 조금은 덜 흔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지나온 길이 결코 몇 가지의 성취 여부와 다른 누군가의 몇 마디 평가로 허무해지거나 무기력해지는 경험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는 아이가 어릴 때 한글은 언제 가르쳐야 할까, 무엇을 시켜야 할까를 먼저 걱정하는 대신 아이와 공유하고 싶은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부터 고민하기로 했다. 나 역시 아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고 부족한 부분은 사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채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커다란 방향을 세워야 아이도 나도 좀 더 편안하게 결과나 주위의 평가에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늘 염두에 두고 싶은 것은 '아이가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 내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주변의 존재를 존중하는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참 추상적이고도 이상적인 이야기이지만. 나중에 아이가 성적 때문에 좌절하더라도 "나는 공부는 잘 못하지만 괜찮아. 내가 가진 다른 점들도 충분히 가치 있어" 말하기를 바라고, 물질적이고 외적인 무언가로 친구들을 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삶을 즐기는 것도 나에게 중요한 가치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좀 더 '즐거움과 기쁨의 시간'을 많이 누리고 주체적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유아기 때만큼은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누구나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안정적인 삶이 중요한 가치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의 위치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일 수도 있듯이. 그 가치를 먼저 고민해본다면 막연하기만 한 육아와 아이 교육의 커다란 방향도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자기 가치를 찾는 것과 함께 아이 교육이라는 긴 여정 동안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뿌리의 바탕에는 나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조건, 어떤 열악한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버리지 않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저항과 투쟁이 있겠는가. 어떤 권력도 자본도 그런 존재를 회유하거나 훼손시킬 수 없다.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p156>
어릴 때부터 승리욕이 유난히 많았던 나는 원치 않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열등감 때문에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캠퍼스에서 만나면 못 본 척 피해 다닌 적도 여러 번이었다.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더니 결국 나랑 똑같은 대학교 왔네?"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한 번의 시험으로 나는 패배자가 된 것만 같아 신입생의 설렘보다는 좌절감이 더 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뒤에도 가끔씩 그 열등감이 나를 괴롭혔다. 결혼하고 임신이 잘 안되었을 때도 자꾸만 더 조바심이 생겼다. 나 스스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마음 한 켠에는 남들의 시선에 대한 의식, 정상적인 과정에서 늦어진다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나를 괴롭혔다. 조리원에서도 모유 먹이는 산모 앞에서 아이에게 젖병을 줄 때 좌절감을 느꼈고, 내 모유는 언제쯤 많이 나올까, 아이는 쑥쑥 클까 안절부절못했고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남들과 비교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됐다. 부모 스스로가 자꾸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 어렵다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열등감이 아이를 무조건 성공적으로 키워보겠다는 욕심으로 가닿을까 걱정스러웠다. 남들과 자꾸 비교하다 보면 내 아이와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는 일에 익숙해질까 두려웠다. 지난해 나는 내 열등감의 원천을 찾아다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꾸 누군가와 비교하는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나의 기질적인 부분은 받아들였고, 입시 제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끝없는 경쟁이 열등감과 우월감, 비교 의식을 만들 만들어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저 사람은 잘하는데 나는 왜 못하지'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저걸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걸 좋아하는데' 하고 열등감이나 경쟁의식 없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나를 긍정하는 과정은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육아를 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속에 늘 담고 있는, 때로는 심각하게 툭 터져 나오는 질문 같습니다. 8살, 6살 남매를 키우고 있는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어렵기만 합니다.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교육에 대한 제 소신을 조심스레 밝힐 때면 "아이들이 어릴 땐 나도 그랬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며 '진짜 교육 현장'에 한 발짝 발을 딛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만, 아이들과 내 소신을 믿는 마음으로 걱정을 덜어 내어 봅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교육에 '소소 교육'이라는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소소하다'는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뜻도 있지만, 밝고 환하다는 뜻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소신을 갖고, 작은 움직임으로, 아이와 밝고 환하게 교육 제도의 긴 터널을 지나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