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니 사교육을 늦게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
얼마 전 가족들과 어디 갔다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간짜장과 잡채밥. 모두 배가 고파 허겁지겁 짜장면을 먹고 공깃밥도 비벼먹고 그렇게 배불리 먹었는데 집에 와서 자꾸 물을 찾는 가족들. 집밥을 좀 싱겁게 먹는 편이기도 하고 그 식당 음식이 유독 간이 셌던 것도 같다. 나도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몇 컵이나 들이켰다.
"엄마, 배가 물로 가득 찬 것 같아"
아이들이 자기 전에 누워하는 말에 "배 흔들면 물소리 나는 거 아니야?" 하고 웃었는데 아이들에게 "왜 자꾸 물이 먹고 싶을까?" 이야기를 나눴다.
"짠 음식이나 간이 센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은 자꾸 물을 찾게 돼"
"그러게, 엄마. 식당 자장면이 많이 짰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짜지?"
"그래야 손님들이 맛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오거든. 음식도 그렇고 자극적일수록 자꾸 생각나고 찾게 되니까 손님들 많이 오게 하려고 식당 음식이 짠 경우가 많아"
"아.. 그렇구나"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첫째가 2살 때 집에 있던 텔레비전을 없애고 어릴 때 영상 노출을 최대한 제한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자극적이고 매운맛은 최대한 늦게 맛보게 하기, 그래야 아이들은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첫째가 17개월 즈음, 둘째를 임신했을 때 시가와 친정에서 뽀로로 만화를 처음 접하고는 집에 와서 매일 뽀로로 타령을 했다. "뽀! 뽀!" 드디어 뽀통령 그분이 우리 집에서 오신 것이다.
"딱 10분만 보고 끄는 거야"
"이거 두 편만 보고 뽀로로 안녕~하는 거야"라는 말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아직 사리분별 못하고 타협이란 없는 2살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텔레비전을 끄는 순간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뭐 예상한 반응, 저러다 그치겠지) 포기하지 않고 리모컨을 들고 나한테 주면서 자꾸만 운다. (예상했지만 분노 게이지가 조금씩 상승하고)
아이는 짜증을 내며 난리난리. 다른 장난감을 줘도 소용이 없다. 울면서 뽀로로만 틀어달라는 아이.
그렇게 하루하루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보고 싶은 대로 실컷 봐~라고 하면 앞으로 더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는 아이와 뽀로로 사이에서 매일 지쳐갔다. 둘째 임신 초기라 맞설 기운도 없었다.
결국 남편에게 제안했다.
"우리 텔레비전 없애면 어떨까?"
동생과 자취하던 시절, 거의 6년 동안 텔레비전이 없는 원룸에서 생활했고 괜찮았었다. 텔레비전이 없다 보니 라디오를 많이 듣게 되었고 또 책도 더 많이 읽었었다. (물론 스마트폰이 없던 때였기에 가능했지만)
결혼하면서 큰 텔레비전으로 영화 보는 게 로망이었던 남편의 바람대로 40인치 텔레비전을 샀다. 그리고 거의 몇 년 만에 텔레비전을 친정에 갖다주었다. 고가의 신혼 혼수품과는 그렇게 안녕했다. 거실에 커다란 평면 TV가 통째로 없어지니 아이는 뽀! 뽀! 소리를 중단했다. 대신 뽀로로 책을 보며 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눈치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 스마트폰이나 영상과는 최대한 늦게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어린아이들에게 텔레비전 시청이나 영상을 보는 일은 간이 센 자장면과 비슷했다. 자극적인 감칠맛으로 자꾸자꾸 먹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런 음식에 길들여질수록 싱겁거나 밍밍한 음식은 쳐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순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본연의 맛을 느끼기보다는 자꾸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만 들지도 모를 일이다.
재미있는 영상을 일찍 접하게 된다면 사소한 건 좀 시시하게 느끼는 것 아닐까 걱정됐다. 아주아주 사소하더라도 아이에게는 온 우주의 만물을 만나는 것처럼(좀 과장해서 말하면) 신비롭고 재미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바람에 최대한 영상에 늦게 노출해 주려 노력했다.
집에서는 영상을 안 봤지만 외출해서 밥 먹을 때가 문제였다. 아이들, 특히 2-3살 혹은 2-4살까지 집중 시간은 아주 짧다. 스티커북 책 클레이? 이런 거 가져가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한창 탐험하고 싶고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영상 노출에 대한 최대 고비는 2살~4살 정도인 것 같다. 사실 이때부터 보여주기 시작하면 다시 완전히 안 보여 주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이미 영상을 보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오히려 5,6살이 되면 뭔가 그리거나 색칠하면서 시간을 좀 보낼 줄 알게 되니까 이때까지 잘 버텨야 한다.
외식을 줄이긴 했지만 바깥에서 밥을 먹는 경우도 생기니 그럴 땐 남편과 아이가 근처에서 돌아다니거나 구경하며 노는 사이, 잽싸게 혼자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 먹을 것을 세팅하고 음식을 받아서 우리도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한 뒤 남편에게 전화!
"여보, 밥 나왔어. 데리고 와!"
아이를 데리고 온 남편.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식사를 시작하면 영상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나마 조금은 여유롭게(?) 셋이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첫째 어릴 때는 주로 집에서 모임을 했다. 친구들도 초대하고, 아이 친구 엄마들도 집으로 초대하거나 다른 엄마들 집에서 만났다. 사람이 많은 곳, 조용한 곳(카페 같은..)에서는 사실 아이에게 영상을 안 보여주면 아이도 엄마도 참 힘들다. 대신 가끔씩 주말에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카페도 가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사람들 만나 밥도 먹고 했다.
기차를 탈 때는 새로운 책이나 새로운 놀 거리를 꼭 챙겨갔다. 그러면 영상을 보여주지 않고도 2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5살 중반(네 돌 때쯤)이 되자 아이의 집중 시간이 좀 더 길어졌고 앉아서 하는 놀 거리도 많아졌다. 가위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클레이로 꼼지락 하는 것도 더 즐기는 나이. 이제는 좀 더 여유롭게 식당에서 밥 먹는 게 가능해졌다. (물론 좀 빨리 먹어야 한다는 단점도... 앉아서 잠시 소화시키는 시간 따위는 사치)
둘째도 오빠를 따라 하다 보니 좀 앉아있는 시간이 나이에 비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지나면 좀이 쑤시는지 말도 많아지고 특히 밀폐된 공간, 기차에서는 자꾸 말을 많이 해서 주변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땐 입에 젤리를 넣어주고, 그림도 끄적거리고. 6살이 되면 대화가 좀 가능해지면서 퀴즈 내기나 (등에 점이 있는 곤충은 뭘까요? 맞추기 등등) 그림 같이 그리기, 색종이 접기 등 할 거리가 많다. 사실 밖에서 뛰어노는 시간이 많아지는 나이이니 영상을 보여줄 시간도 잘 없다. 주말에 시간을 정해서 보여주는 것으로도 아이의 욕구가 조금은 해소되었다.
이렇게까지 꼭 해야 돼? 좀 보여주면 안 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방법이 편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영상을 늦게 접하다 보니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바깥에 강제로라도 나가서 뛰어놀거나 돌아다닐 수 있는 점도 좋았다. 또 자연스럽게 책 읽는 걸 즐기게 되었다. 책들을 뽑아 읽어달라 하기도, 혼자 읽기도 하며 그렇게 책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스마트폰이나 영상과 비켜난 일과 속에서 책 읽기는 분명 재미난 놀이였다. <공부 상처>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학습 부진 탈출을 위한 팁에서도 '텔레비전 버리고 독서!'를 강조한다.
뻔한 말이지만 '텔리비전을 치우고 책을 읽게 해야 한다'...학습 부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책에 대한 태도가 변하느냐 변하지 못 하느냐로 결정된다. <공부 상처, p70>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것,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때론 힘든 육아에 쉴틈을 주는 단비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시간을 잘 지키며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오히려 제한과 허용을 가르쳐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사교육 시킬 여력은 안되지만 아이가 학교 공부는 어느 정도 따라가길 바란다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아이가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면 영상 노출을 늦추거나 최소화하는 건 꽤 괜찮은, 성공률 높은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