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날을 기억한다. 나는 첫 월급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고 내 수중엔 13,500원이 있었다. 그래, 아무리 돈이 없어도 하루에 아이스크림 한 개는 먹을 수 있구나, 하며 나는 일주일을 잘 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차 있었다.
그때 문득 휴대폰에 알림이 울리기에 택배 올 게 있었나 싶어 확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기후원하던 구독 서비스에서 13,000원을 빼갔다. 나는 졸지에 내 미래의 아이스크림들(엔초, 옥동자, 메가톤, 와일드바디, 구구)을 구독서비스에 털려버렸고 그 자리에서 구독서비스를 끊어버렸다.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슬펐다. 그리고 그때 내 손목 위에는 '와, 되게 좋은 가격(수십만 원)에 나왔다!' 하며 앞뒤 안재고 신나서 구매했던 시계가 있었다. 나는 과거의 내가 했던 잘못에 대해서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으나, 그저 서로 합의한 계약상의 수금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구독서비스를 해약해 버렸다.
시계 개수를 늘리고 내 생명력을 깎아먹는 이 짓거리를 내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닐 터. 그러나 나는 온라인 중고시장에 내가 원하는 브랜드들을 키워드로 등록해 놓고, 해당 시계를 판매하는 글이 올라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확인하겠다는 마음으로 헐레벌떡 달려간다. 그리고 윌리 웡카의 초콜릿 가게 앞을 지나는 찰리처럼 진열장 앞에 두 손을 척하니 올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매물이라도 돈이 없다면 내 시계가 아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애처롭게 구는지 모르겠다. 가끔 판매자에게 연락을 넣어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꼭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 후려치기를 감행하는데, 내 통장 잔고를 다 털어놓고 이번달에 시리얼과 두유로만 생활할 각오를 하면 그 시계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매일 같이, 혹은 하다 못해 2~3일에 한 번씩은 '좋은' 매물이 올라온다. 여기서 좋다는 뜻은 아래의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먼저, 평균 거래되는 중고 매물의 가격보다 더욱 저렴하다. 앞선 다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웬만한 시계가 아니고서야 시계는 구입과 동시에 아주 빠르게 가격이 하락한다. 기본적으로 가격 방어가 잘 안 되는 물건이라서 그런지 온라인 중고 시장의 가격과 실제 매장 판매가를 비교해 본다면 절반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 와중에 가끔, 그런 중고 가격보다도 더 낮은 가격으로 올라오는 매물이 있다. 물론 가격이 낮은 물건에 사람들이 더 앞뒤 안재고 덤벼든다는 것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사기 조회 사이트를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급하게 판매한 경우가 있다면, 정말이지 더 이상 구매를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정글엔 먹이를 노리는 퓨마들이 넘쳐나서, 이 매력적인 게시글은 조회수가 두 자릿수가 되기도 전에 판매완료라는 메시지가 걸린다. 그 메시지는 곧 누군가 남들이 누리지 못한 그 행운을 거머쥐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평소에 잘 나오지 않던 희귀한 매물인 경우다. 희귀한 시계라고 했을 때 먼저 떠오르는 건 무엇인가? 몇십 년 전에 단 10개만 판매하고 끝나버린 비운의 명작, 당대에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받은 그 시계는 사실 시대를 앞서나간 시계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희귀하다는 의미가 정말 '시계'라는 영역 내에서 희귀하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는 굳이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탐낼 만큼 수집가치도 높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계는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에 올라오지, 내가 쓰는 중고 시장, 당근 시장, 번개 시장에 올라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희귀함은 '중고 시장 안에서' 희귀한 경우이다. 애초에 시계가 중고 시장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새 시계를 샀어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 시계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 혹은 당장에 급전이 필요해서, 혹은 모종의 이유 때문에 시계를 온라인 중고 시장에 게시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중고 시장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보통 메이저브랜드보다는 해외의 마이크로브랜드의 시계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오메가, 롤렉스, 까르띠에라는 이름은 시계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일 정도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로리에(Lorier), 만(Maen), 브루워치(Brewwatch), 포이보스(Phoibos), NTH. 이들은 비교적 최근인 약 2000년대부터 자체적으로 시계를 디자인해 오고 만들어왔으며 접근 가능한 가격으로 시계를 제공하는 브랜드들이다.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마이크로브랜드가 있으며(개중에는 하이엔드 브랜드도 왕왕 있다) 한국까지 들어온 몇몇 브랜드와는 달리 아직 해외 직구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브랜드도 많다. 내가 메이저브랜드로 생각하는 독사(Doxa)나 벰페(Wempe) 역시도 이렇다 할 국내 수입원이 없어서 구매자가 알아서, 잘, 열심히 구매 루트를 뚫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킥스타터에는 오늘도 수많은 브랜드들이 서로의 개쩌는 시계를 펀딩 받고 제작하여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런 시계들은 중고 시장에 올라온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지기에, 가격이 어떻든 덥석 덥석 채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놀랍게도 이 두 가지 모두가 공존하기도 한다. 직접 보기 힘든 시계인 데다가 무려 판매하는 가격이 중고 가격의 절반이고 실제 판매하는 가격의 1/4 수준인 경우. 바로 내가 그렇게 내 NTH의 명작 SUB300 시계를 팔았고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산 게 무엇이냐 하면 론진 콘퀘스트 L3.656.4.56.6, 너덜너덜한 그 시계였다.
온라인 중고 시장에 업로드되는 시계 게시글을 바라보면서 텅텅 빈 내 통장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치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놀랍게도 그렇게 사는 시계들은 게시글에 있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웠으나 내 시계함에 들어가는 순간 알 수 없는 좀스러움에 파묻히고 나는 시리얼과 두유로 생명을 연장하며 '이것들 살 바엔 롤렉스를'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매물이라도 돈이 없다면 내 시계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좋은 매물이라도 내 손목은 하나고 차야할 시계는 많기 때문에 굳이 저 시계가 내 시계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정신수양하는 기분으로, 혹은 거미 공포를 치료하기 위해 거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론 위즐리처럼 중고 시장을 들락날락 거린다. 오늘도 정말 갖고 싶던 브랜드의 시계가 합리적인 가격(수십만 원)에 올라왔고, 그거 참 좋은 시곈데, 교환가능하냐고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