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미지는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만 예쁘죠? Omega Marine 1936(timeline watch)
"돈 많이 드는 취미네."
2021년 초,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한테 '시계가 왜 좋아?'하고 묻길래 한 손에 위스키를 쥔 채 젠체하며 '시계는 남자의 장난감이지'하고 말했었다.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그때 그곳으로 가 내 뒤통수를 위스키 보틀로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다.
2020년 가을에 처음 시계에 빠졌다. 한참 전 고등학생 때 친형이 본인의 신혼여행을 다녀오며 내게 선물했던 스와치의 아이러니 시리즈가 내 첫 시계였는데, 2020년 가을, 깨지고 흠집 난 시계를 수리하면서 시계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고 평소에 멘토 삼던 형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니 '돈 많이 드는 취미네'했다. 그렇다. 돈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돼지저금통을 탈탈 털어서 롤렉스나 오메가의 케이스 겉이라도 핥아봤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생활인이고, (큰) 돈이 없(었)다. '롤오까 미만 잡(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 보다 '등급'이 낮은 시계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라고 하니, 나는 내가 사모은 조그맣고 잡스러운 시계들을 껴안고 무덤까지 가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내 시계들은 그네들꺼만큼 이쁘니까.
나는 3년, 햇수로 4년 동안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여전히 대중교통을 탈 때 남들 손목에 뭐가 달렸는지 음험하게 흘깃거리기 때문이다. 와, 반가워요. 시계 좀?
그동안 많은 시계를 사고팔았고, 그보다 배는 많은 시계의 정보를 탐독했다. 그것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손목시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남자들은 "내가 손목시계를 차느니 치마를 입지!!"라며 저항했지만 곧 그런 말을 단언하듯이 하면 시대에 도태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손목시계는 훌륭한 산업의 아이템으로 성장했다. 나치스가 더 많은 연합군을 죽이기 위해 만든 항법용 시계의 디자인은 요즘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연합군이 더 많은 나치스를 죽이기 위해 만든 시계의 디자인 역시 인기리에 판매 중이다. 베트남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때 팔리던 몇몇 시계는 지금도 '역사적 헤리티지'라며 잘 팔리고 있으므로 3차 세계대전에서는 또 어떤 개쩌는 시계가 무고한 이들의 피웅덩이 속에서 탄생할지 궁금하다. 기타 등등, 기타등등. 시계에 얽힌 이야기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는 시계에 대해 쓸 예정이 아니다. 나는 그쪽 분야를 공부하지도 않았고, 혼자 시계 수리도 못하는 사람이다(그래도 시계줄이랑 배터리는 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 그것도 한정된 자산과 좁은 식견, 그러나 보편적이지 않은 취향을 겸비한 시계인의 삶에 대해 쓴다. 당신에게 예산이 충분치 않은가? 한정된 가격 내에서 시계는 사고 싶은데 어쨌든 좀 쓸만했으면 좋겠는가? 그러니까, 고장 나면 적어도 고쳐 쓸 수는 있고, 한몇 년은 걱정 없이 쓸 수 있으며, 나중에 중고거래에서 가격방어는 잘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을 품을 수 있는 조그맣고 잡스러운 시계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반갑다. 나도 원한다. 그리고 그게 시계인으로서 내가 매일 강박적으로 시달리는 생각이다.
강박증 하니까 생각난 건데, 시계를 좋아하다 보면 거치는 일상의 과정이 있다. 오늘 차고 나온 시계가 괜히 마음에 안 들어서 후회하기. 평소에 시계함에 고이고이 모셔두던 (나름) 고가의 시계를 차 놓고는 혹시라도 흠집 날까 봐 걱정하기. 정말 고장이 난다면 수리비는 얼마일지 어림잡아보기. 나중에 내가 노년까지 이 시계를 찰 수 있을지 걱정하기(대부분은 그전에 중고거래로 팔릴 가능성이 높다). 200m의 방수성능을 가진 이 시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서 괜히 착용하고 샤워하기. 그러고는 전라의 몸에 시계만 걸치고 있기. 그러다 문득 예산은 없지만 새로운 시계를 갖고 싶으니까 온라인 중고시장 돌아다니기. 그러다가 괜찮은 시계를 발견한다면 꼭 구매문의를 하기 전에 '데일리' 같은 말을 떠올리기.
시계인의 또 다른 습관은 꼭 시계를 사며 이렇듯 '데일리' 혹은 '전투용'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선물'과 동의어로, 시계를 사는 그 순간 자신에게 느껴지는 허영심과 통장잔고 탕진에 대한 두려움 등 심리적 부담감을 가릴 때 쓰는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천수관음이 아니기에 손목은 하나, 거기에 올라갈 시계도 하나뿐이고, 무엇보다 나는 이걸로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다. 내가 하는 전투라고 해봤자 사무실에서 듣는 빻은 말에 앙증맞은 두 손을 부들거리는 것뿐인데, 내 손목 위 시계는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기계식 시계는 망했다. 1960년대 말에 배터리 시계가 싼값에 시장에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지금은 애플워치가 말 그대로 손목 위의 스타일과 기능 모두를 담당하면서 그렇게 됐다. 당신 주변에 누군가가 애플워치가 아닌, 그런데 뭔가 예스럽고 독특한 시계를 찬 채로 '시계는 남자의 장난감이지'같은 소리를 하는가? 그는 보기 드문 중증의 시계 마니아이면서 당신이 어느 정도 시계에 대해 묻길 원하는 허영심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차도 없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피곤하지 않냐 하면, 좋다. 어쨌든 태엽 감으면 째깍째깍 움직이는 나의 시계가 나는 참 좋다. 매일 아침 내 시계를 손목에 찰 때, 그리고 일하다가 내 손목 위에 놓인 시계를 볼 때 참 좋다. 그래서 이런 좀 좀스런 시계인의 생활을 나누고 싶었다, 하하.
마지막으로, 나의 시계 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어준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와 채널의 호스트 김생활님(김성준님)께 무한한 감사를. 당신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그대에게 번영과 장수와 포스가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