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지금 차고 있는 내 시계. about vintage by skov andersen 1926 automatic(skovandersen)
난 있잖아 내 시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의 시계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어준 유튜브 채널 <생활인의 시계>. 채널의 호스트 '김생활(김성준)'님이 시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나 또한 내 시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이것은 김성준이라는 메신저의 역할도 크다. 국내에 페미니즘 저서 몇 권을 번역한 사람이면서, 정치학 연구자라는 그의 특징이 여성학 연구자 지망생인 나로 하여금 그의 메시지에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생활인을 위한 시계들을 차분히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돈이 없지 취향이 없냐'던 이야기였다. 하이엔드 시계 같은 사치품을 쉽게 고를 수 없는 나 같은 생활인에게도 취향이란 존재하고, 예산이 적어도 시계를 고르는 미적 감각을 키울 수는 있는 거니까.
그런 채널에서 최근 올라온 영상 중 다음의 영상이 있었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 독립 브랜드 오리스의 2023년 신제품들>. '접근가능한 럭셔리(affordable luxuries)'를 지향하는 스위스의 시계브랜드 오리스(ORIS)의 CEO인 롤프 스튜더(Rolf Studer)와 김생활님 사이의 대화를 담은 영상이다. 영상의 3분 11초 즈음에 스튜더는 '어째서 고객이 우리의 시계를 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의 시계들이 여러분을 미소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와중에 손목을 비틀어 내 시계를 보는 순간, '아, 참 예쁘다'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다시금 내 일을 하고 내 삶을 살게 만드는 것. 그게 오리스의 대답인 것 같고, 나의 좀스런 시계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 정리전문가 곤도 마리에(Kondo Marie)의 격언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말은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 만약 그 물건이 당신을 설레게 한다면? 그게 그 물건의 역할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계 생활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는 아름다운 순간이고, 강박적 사고와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이 시계는 본질적으로 약점을 갖고 있는데 '모든 것에 약하다'는 점이 그렇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배터리만으로 구동되는 쿼츠(quartz)라는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기계식 시계 회사들은 정말 공중폭격을 맞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도산했다. 왜냐면, 쿼츠 시계는 기계식 시계보다 가격면에서 저렴하고, 정확성이 훨씬 높고, 충격에도 더 강하기 때문이며, 수리비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쿼츠파동'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바로 이 시장 파괴성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시계 회사들이 다 함께 힘을 합쳐서 쿼츠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기계식 시계의 위상을 드높인 일련의 역사가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지금에 와서 보면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건 위상을 드높였단 뜻이지, 기계식 시계가 갖고 있는 병약함을 어떻게 잘 해결했다는 뜻이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지금에 와서 아무리 '불멸의 화가', '태양의 화가'라고 띄워준다 한들, 그게 그가 생전에 느낀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궁핍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 손목 위의 시계는 분명 예쁘다. 하지만 동시에 얘가 언제 박살이 날지 동시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나 사랑해? 나 사랑하지?'하고 사랑을 계속 확인받으려는 연인처럼 '너 괜찮지? 너 안 고장 나지?'하고 시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시계의 어느 부분이 헐거워지지는 않았는지 만져보고(대부분의 스크루다운 크라운이 이 강박증 때문에 고장 나는 것 같다), 혹시 어디 기스라도 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그마저도 다 하고 나면 시계 수리 비용은 얼마인지, 내가 맡길 서비스 센터의 품질은 괜찮은지 구글에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좀 더 나가 보자. 아무리 스위스 메이드, 코리아 메이드, 아메리카 메이드, 재팬 메이드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시계는 그 본국에서 조립되는 것이지, 부품의 생산 대부분은 중국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알리익스프레스 같은 중국 제품 판매 플랫폼에서는 범용으로 만들어진 시계 부품의 대부분을 구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범용 부품을 조립해 상당히 괜찮은 품질의 시계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알리익스프레스 시계는 아예 하나의 팬덤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용하다 보면 특히 많이 해지고 떨어지는 시계의 가죽줄, 어쩌다 보니 와장창 깨 먹은 시계 유리, 긁히고 깨지고 난리난 시계 부품들을 하나씩 구매하다 보면 어느새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배송 올 물건이 한가득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그 부품들을 모두 활용하여 자가수리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다. 그냥, 한국의 시계 수리 업자분들이 내게 딱 맞는 부품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때를 위해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지, 뭐. 문제는 내가 예상하는 온갖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른 보험과 달리 이 경우에는 만기환급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꽤 가격이 나갔지만 이제는 잡스럽고 쓸모없는 잔잔바리들만 내 손에 한 봉지 남을 뿐이다.
이게 다 내 손목 위의 시계가 너무 예뻐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하다 하다 시계 본사에 이메일을 넣어서 시계 부품을 따로 주문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국제우편으로 그것이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놓고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 '헤헤, 그럼 지금 이 이쁜 시계는 좀 막 써도 나중에 또 고칠 수 있겠지?' 한다. 나 자신에게 나는 매일 '기계식 시계라는 건 원래 굉장히 긴 세월을 버티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누누이 말하지만, 내 강박증은 내 초자아의 명령 따위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부품값으로 내 마음이 편해진 거니까, 돈을 주고 안심을 샀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어쨌든 오늘 차고 나온 내 시계가 참 예쁘다. 우리 오래가자?